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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전부는 아니잖아요[이정향의 오후 3시]

입력 | 2021-03-10 03:00:00

<28> 아티스트(The Artist)




이정향 영화감독

10년 전에 나온 무성영화다.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1회 이후로 83년 만에 상을 탄 무성영화이기도 하다. 첫 유성영화가 등장한 1927년을 전후로, 무성영화가 유성영화에 자리를 내어줄 수밖에 없던 격변기가 무대다. 그 당시, 무성영화계를 주름잡던 수많은 스타가 유성영화에 적응을 못해 초라하게 사라졌다. 목소리와 발성의 문제, 대사를 대신했던 과장된 몸짓과 표정이 유성영화에서는 오히려 독이 되었다.

주인공 조지도 시대의 변화를 무시하고 무성영화를 고집하다 돈과 명성을 잃는다. 그러다 그를 사랑하는 여인의 도움으로 재기한다는 익숙하고도 뻔한 내용이지만 놀랍게도 감동적이다. 심지어 흑백 화면에 무성이라 배우들이 금붕어처럼 벙긋대고, 아주 가끔 생색내듯 자막을 띄워줄 뿐이다. 그래서 한눈팔지 말고 화면에 집중해야 했다. 영화 내내 흐르는 관현악의 가락에서도, 화면 속의 소품과 구성에서도 대사만큼 중요한 그 뭔가가 숨어 있기에 능동적으로 생각하며 영화를 따라가야 했다.

다 보고 나니, 마치 나도 영화의 완성에 참여한 듯 뿌듯했다. 배우의 웃음과 울음이 들리지 않는데도 충분히 즐겁고 슬펐다. 흑백이지만 현실보다 찬란했다. 유성영화는 관객이 대사에 집중하게 되므로 무성영화가 추구한 예술적 장치들이 힘을 잃고, 또한 관객이 생각할 여지마저 빼앗을 거라는 우려를 안고 출발했다. 그로부터 100년이 흘렀다.

나는 몹시 수다스럽다. 젊었을 때 얘기지만 외국에 가면 남자들한테 여기서보다는 좀 통했다. 여자 나이와 외모부터 보는 한국 남자들과는 달리 여자의 개성과 매력을 볼 줄 아는 안목 덕이라고 여겼지만, 실은 내가 말없는, 조용한 여성인 줄 알아서다. 나의 외국어 말문이 트이면 다들 멀어졌다. 말로 천 냥 빚도 잘 지는 나는 그만큼 말의 허영도 잘 안다. 그래서 사람을 판단할 때는 말보다 행동을 본다. 말이 전부가 되어버린 세상인지라 말로는 못 할 것이 없다. 십 년 연애를 해도 하루 같이 살아본 경험을 못 당한다고들 하지 않나.

“잘될 거야” “힘내” 같은 말이 인사말처럼 흔하게 쓰이지만 나는 이 말이 불편하다. 행동으로 돕지 못한다면, 마음을 모아 기원하지 않는다면 빈말일 뿐이니까. 두 개의 유리병에 밥을 한 덩이씩 담고 한쪽엔 매일 예쁘다고 칭찬을 해주면 그렇지 못한 밥에 비해 더 오래 싱싱하게 버틴다는 방송을 봤다. 나도 해봤다. 그 대신, 입으로는 예쁘다, 예쁘다 하면서도 속으론 미워했고, 다른 쪽엔 밉다는 말을 퍼부으면서도 마음으로는 아꼈다. 보름 후, 매일 밉다는 욕을 들은 쪽이 내 마음을 안다는 듯 덜 상했다. 밥알도 빈말은 싫어하나 보다.


이정향 영화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