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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 좋은 말, 언짢은 말[즈위슬랏의 한국 블로그]

입력 | 2021-01-29 03:00:00


일러스트레이션 박초희 기자 choky@donga.com

재코 즈위슬랏 호주 출신·NK News 팟캐스트 호스트

아마추어 언어학자로서 나는 항상 언어가 귀에 어떤 소리로 들려오는지에 관심을 쏟는다. 어릴 때 네덜란드에서 이민을 왔던 호주에서 영어를 배울 때 쉽게 헷갈리는 단어, 귀에 들리는 음성이 기분 좋은 단어, 뜻은 좋지만 소리가 별로 즐겁게 들리지 않는 단어에 특히 매료됐다.

한국어를 배울 때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단어는 듣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거나 나빠진다. 물론 듣는 사람 나름이겠지만 말이다. 한국어의 의성어와 의태어가 대표적인 예다. 나는 싱글벙글, 소곤소곤, 두근두근, 덩실덩실, 퐁당퐁당, 아사삭, 그리고 시원시원하다는 말을 발음할 때, 그리고 들을 때 살짝 미소를 짓는다.

가끔 언어가 만들어내는 소리 그 자체가 재미있어 들을 때마다 마음속으로 웃는 단어들도 있다. 어쩌고저쩌고하다, 운운하다, 시부렁거리다, 부랴부랴. 이런 말들은 쓸 일은 흔치 않지만 재미있게 들린다. 특히 ‘부랴부랴’는 주로 서술어와 붙어서인지 나에겐 약간 귀엽게까지 들린다. 만약 우리가 누군가를 재촉할 때 “빨리빨리!”라고 외치듯 “부랴부랴!”라고 소리 지른다면 그 매력이 살짝 떨어지겠지만 말이다.

의미 때문에 감동을 주거나 반대로 충격을 주는 말도 있다. “이건 서비스예요” “내가 한턱 쏜다!” “인연을 끊자!”. 마지막으로 남자친구나 여자친구, 혹시 배우자에게서 듣는다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너무나 무서운 짧은 문장. “나 할 말 있어.”

기능적인 이유로 좋거나 나쁘게 들리는 말도 있다. 식당이나 카페에서 “죄송하지만 그런 건 따로 없습니다”라는 말을 들을 때다. ‘따로’라는 말이 등장하는 순간 ‘아, 내가 원하는 걸 얻지 못하겠구나’ 하는 느낌이 든다. ‘따로’라는 말이 별 의미를 추가하진 않지만 나쁜 소식을 전달할 때 의미를 좀 더 부드럽게 전달해주는 기능이 있는 것 같기는 하다. 머릿속으로는 ‘아, 이 사람이 나를 당황하지 않게 해주려고 하는 거구나’라고 생각하지만 듣자마자 마음속으로는 어쨌든 ‘속상하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인 것 같다.

최근 이런 언어학적 현상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볼 기회가 생겨서 소셜미디어로 외국인과 한국인 친구들에게 물어봤다. “듣자마자 기분이 언짢아지거나 답답하게 만드는 한국어가 있다면?” 한국인뿐 아니라 한국어에 유창한 외국인 친구들도 꽤 많은 답을 줬다. 소리나 의미 때문에 듣자마자 마음이 상하는 표현들을 모아봤다.

우선 외국인 친구들 처지에서 기분이 상할 만한 말이다. “외국인이라 이해 못해.” 나를 비롯한 외국인 친구들은 이 말의 다양한 버전을 그동안 귀가 따갑게 들어왔다. 한 외국인 친구는 한국인 친구와 한 시간이나 토론한 끝에 한국인이 이 말을 했다고 하는데 논쟁 끝에 이런 말을 한다면 이 말이야말로 천하무적 승부수다. 반대로 “(외국인인데) 잘 아시네∼”라는 말을 들은 한 친구는 ‘무지한 외국인이 놀랍게도 이런 것도 아네’라는 뉘앙스로 들릴 때가 있다고 한다.

다음은 ‘꼰대’ 같은 발언으로 대화를 단절시키는 사례다. “내가 많이 해봐서 아는데” 혹은 “그게 아니라, 넌 말해도 몰라” “됐고! 됐거든!” 같은 표현들이다. 한 여자 지인은 “까라면 까”라는 말을 최악으로 꼽았다. ‘무엇이든지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라’라는 뜻에서 한국의 군대 문화도 엿보인다.

그 밖에도 “야!”라고 외치는 한 음절에 기분이 상하는 경우도, “기분 나빠하지 말고 들어”라며 어차피 이어질 나쁜 소식을 기분 나쁘게 시작하는 표현도 꼽혔다. 한 친구는 내가 ‘따로’라는 말을 들을 때 불편함을 느끼듯이 ‘다름이 아니라’라는 말에 굉장히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었다. 내가 처음에는 그의 마음을 이해 못 하고 ‘그렇게까지 싫어할 만한 표현인가’라고 생각했으니 역시 언어학적 반응이란 지극히 개인적이고, 제각각이다.


재코 즈위슬랏 호주 출신·NK News 팟캐스트 호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