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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서 만들어진 말 ‘짬밥’…유래는[손진호의 지금 우리말글]

입력 | 2020-11-15 08:51:00


동아일보 DB.

며칠 전 친구 몇이서 함께한 저녁 모임. 메뉴판을 훑어보다 적이 놀랐다. ‘골동반(骨董飯)’이 떡하니 올라 있는 게 아닌가. ‘골동반’을 아느냐고 묻자 하나같이 고개를 가로젓는다. ‘고기나 나물 따위와 여러 가지 양념을 넣어 비벼 먹는 밥’이라고 하자, “설마, 비빔밥?”이라며 눈이 휘둥그레진다. 맞다. 골동반은 비빔밥이다. 우리 사전은 둘을 같은 말로 올려놓고 있다. 언어현실은 어떨까. 골동반은 비빔밥에 밀려 입말에서 거의 멀어졌다. 골동반을 처음 알게 됐다는 친구 말처럼 사전에 박제화된 말일 수도 있다.  

짬뽕의 처지도 비빔밥과 닮았다. 열이면 열, 짬뽕이라고 하는데 사전은 초마면(炒碼麵)과 짬뽕을 같은 말로 올려놓았다. 이것도 짬뽕을 초마면으로 고쳐 사용하라고 우기다 한발 물러선 것이다. 짬뽕의 뿌리는 초마면일지 모르지만 100여 년의 세월을 거치며 우리 입맛에 맞는 음식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중국집에서 초마면 달라고 하면? 그야말로 ‘웃기는 짬뽕’이 된다.   

비빔밥, 짬뽕과 달리 출세가도를 달리는 먹거리가 있다. ‘짬밥’이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한자어 ‘잔반(殘飯)’을 누르고 세력을 넓혀 나가는 중이다.

동아일보 DB.

짬밥은 ‘잔반에서 변한 말로, 군대에서 먹는 밥을 이르는 말’이다. 혹시 대궁(밥)을 아시는지? 삼시 세끼를 배부르게 먹을 수 없던 힘든 시절을 살아낸 사람들에게는 ‘눈물 밥’이었다. 대궁은 ‘일부러 남긴 밥’이다. 어느 날 벗을 찾아온 손님이 ‘밥을 대접할’ 형편이 못 되는 그 집 사정을 알아채고는 일부러 밥을 남긴다. 그렇게 손님이 남긴 걸 물려받아 먹는 밥이 대궁이다. 그러니까 대궁의 한자어인 잔반, 즉 ‘먹다 남은 밥’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다.

잔반은 빨리 발음하면 ‘잠반’이 되는데 이유 없이 첫소리를 된소리로 발음하면서 ‘짬반’이 된다. ‘짬’은 한자가 아니니 ‘반’과 어울리지 않아선지, ‘반’은 ‘밥’으로 바뀐다. ‘짬밥’이 되고 나니 왠지 사잇소리가 들어가야 할 것 같아 발음이 ‘짬빱’으로 바뀐다(한성우 ‘우리 음식의 언어’).

이처럼 군대에서 만들어진 말, 짬밥은 어느덧 군대 밖으로까지 확대됐다. 짬밥을 많이 먹었다는 건 군대 생활을 오래했다는 뜻. 거기에서 계급이 높고 경험이 많다, 더 나아가 ‘연륜’을 이르는 말로 확대되었다.  

다시 골동반 얘기로 돌아가자. 한 친구의 말이 기막혔다. “비빔밥보다 왠지 골동반이라고 하니까 훨씬 맛있는 것 같다.” 다들 웃었지만, 같은 뜻의 고유어와 한자어가 있을 때 한자어를 대접하는 것은 음식도 마찬가지인 듯싶어 씁쓸했다.

songba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