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동아플래시100]경성 기생→단발 미인→영화배우, 강향란을 아시나요?

입력 | 2020-09-26 11:40:00

1922년 6월 22일






플래시백

“내 몸과 터럭, 피부는 부모로부터 받은 것이니…”하며 긴 머리카락을 애지중지했던 우리 선조들에게 1895년 11월 15일 날벼락이 떨어졌습니다. 단발령이 공포된 겁니다. 고종부터 모범을 보였습니다. 공포일 새벽 농상공부대신 정병하, 내부대신 유길준을 불러 자신과 태자의 상투를 자르게 했습니다. 일본의 입김으로 강요된 단발령은 성리학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이며, 나라의 명맥을 끓는 것이라고 여긴 유생과 민중들이 거세게 저항했지만 단발은 점차 대세가 됩니다.

학생 시절의 강향란. 단발하기 전의 모습이니 경성 누하동에 있던 배화여학교에 다니던 때로 보인다. 사랑하는 청년을 만나 장래를 언약한 뒤 부푼 꿈을 안고 학업에 정진하던 시기였다.

하지만 여성의 머리모양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그대로였습니다. 여성의 ‘삼단 같은 머리채’는 가부장적 사회에서 요조숙녀, 현모양처의 상징과 같은 것이었으니까요. 결혼하기 전에는 길게 땋은 편발, 결혼 후에는 땋은 머리를 틀어올려 비녀를 꽂은 낭자(쪽진 머리), 게다가 머리숱이 많아보이도록 덧넣은 월자도 있었습니다.

실연의 아픔을 극복한 뒤 당당하게, 남자와 똑같이 살아보겠다며 단발하고 남장을 한 강향란. 배화여학교는 단발한 여자는 다닐 수 없다고 해 서대문 정칙강습소로 옮겨 학업을 계속했다.

그런데 1922년 6월 22, 24일자 동아일보 3면에 실린 ‘단발랑’, 즉 단발한 낭자라는 기사가 ‘나비효과’를 일으킵니다.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경성 화류계에서 이름난 젊은 기생 강향란은 부유한 청년 문사를 만나 장래를 약속하고는 기적(妓籍)을 내던지고 여학교에 다니며 장밋빛 꿈에 부풀어 있었는데, 남자의 변심으로 절망해 자살을 기도합니다. 한강철교에서 뛰어내리려는 순간 극적으로 구조된 그는 목 놓아 울다 굳게 결심합니다. “남자에 의지하고 동정을 구하는 것부터 글렀다. 나도 사람이다. 남자와 똑같이 당당하게 살아야겠다.” 곧바로 곱게 길러온 머리를 싹둑 자른 강향란은 남자 양복까지 갖춰 입고 주체적인 삶을 시작합니다.

1926년 영화배우로 데뷔한 강향란. 단발한 뒤 다시 자살을 기도하기도 하고 중국, 일본 등지로 떠돌아다니다 ‘봉황의 면류관’이라는 작품에서 아주머니 역을 맡았지만 배우로서도 활발한 활동을 하진 못했다.

마치 길거리 변사가 흥미진진한 얘기를 들려주는 것 같은 문체로 써내려간 이 기사는 장안의 화제가 됐고, 강향란은 보수층의 비판과 진보의 지지를 동시에 받으며 일약 명사가 됐습니다. 한동안 그의 소식이 끊기자 “강향란의 근황을 알려 달라”고 요구하는 독자도 적지 않을 정도였죠. 동아일보는 이에 1925년 9월 3일자 ‘독자와 기자’ 란을 통해 그가 중국 상하이, 일본 도쿄를 오가며 여성운동에 힘썼고 부산에서 신문기자로 활약하고 있다고 소개했습니다. 이후 강향란은 호구지책으로 잠시 영화배우로 나서기도 했습니다.

1929년 11월 9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해외만평 ‘여자의 세상’. 골프 치는 남녀의 등에 큼지막하게 ‘남’, ‘여’라는 표지가 붙어 있다. ‘여자의 단발이 대유행이 되면 골프구락부원은 이렇게 해서나 남녀를 구별할까?’라는 설명이 그때까지도 여성의 단발에 대해 보수적인 분위기를 엿보게 한다.

강향란은 조선사회에 큰 파문을 몰고 왔습니다. 몇몇 기생은 그를 모방하듯 더 이상 이런 생활을 계속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단발을 했고, 일부 신여성들도 동참했습니다. 1924, 25년은 여성 단발이 유행하기 시작한 때인데, 1925년 8월 동아일보 최초의 여기자이자 사회주의 여성해방운동가인 허정숙은 당시 그를 포함해 ‘조선공산당 여성 트로이카’로 불렸던 주세죽, 고명자와 함께 단발하며 기폭제 역할을 했습니다.

여성 단발에 대한 찬반 논쟁도 뜨거웠습니다. 많은 독자들이 신문지상을 통해 설전을 벌였고, 1926년 1월엔 경성 중앙청년회관에서 ‘현대 여자의 단발이 가(可)? 부(否)?’라는 토론회가 열리기도 했습니다. 찬성하는 쪽은 주로 머리단장에 드는 시간과 돈을 아낄 수 있을 뿐 아니라 능률과 위생에 좋다는 이유를 들었습니다. 어떤 이는 하루 8시간 노동으로 연간 100원의 수입을 올린다고 할 때, 1000만 조선 여성이 모두 단발해 단장시간을 하루 30분 아껴 이를 노동에 제공하면 국가 전체로 월 500만 원(현재가치로 약 450억 원) 이상을 벌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죠. 반대파는 단발은 일종의 유행병이요, 서양 숭배이며, ‘시간경제’ 운운하는 것은 게으른 자의 변명이라고 맞섰지만 도도한 흐름을 막을 순 없었습니다.

강요된 인습에 맞서며 치열한 삶을 살았던 ‘트렌드 세터’ 강향란은 영화배우 이후 행적이 묘연해졌지만 지난해 여름 음악극 ‘낭랑긔생’의 주인공으로 다시 살아나 용기 있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했습니다.

정경준 기자 news91@donga.com


원문

斷髮娘(단발랑) (一·일)

花柳界(화류계)에서 學窓生活(학창생활)에

머리 깍고 남복한 녀학생

그는 한남권번의 강향란



시대가 변하고 사회가 변함을 쫏차 구미(歐米·구미) 각처에서 조수 밀듯이 도도히 흘너 드러오는 사상(思想·사상)은 조선 청년들의 머리를 이리 흔들고 저리 흔들어 요사이 청년들의 마음은 실로 천태만상(千態萬狀·천태만상)의 경향이 잇다. 련애(戀愛·연애)니, 여자해방(女子解放·여자해방)이니, 사회주의(社會主義·사회주의)니, 무엇이니 하야 떠들고 야단치는 것도 실로 사회의 중대한 현상이어니와 요사이 경성 시내에는 엇던 녀학생이 머리를 깍고 남자 양복에 캡 모자를 쓴 후 이곳저곳으로 도라다닌다 하야 일반 사회에서는 이야기의 꼿이 피게 되엿다.

과연 반만 년 녯날부터 조선 녀자로는 그의 머리를 여자의 면류관(冕旒冠·면류관)으로 알고 여자의 자랑거리로 알기 때문에 산에 들어가 중노릇을 하는 여자 외에는 머리를 깍근 녀자가 한 사람도 업셧다. 그러나 이 머리를 깍근 여자는 산에 들어가 중이 되기 위하야 머리를 깍근 것이 안이오, 자긔의 무슨 주의와 무슨 리상(理想·이상)을 위하야 머리를 깍근 것이라 한다. 『불란서』나 『독일』이나 기타 구미 각국에는 모든 것을 남자와 갓치 살어보겟다는 의미로 머리를 깍고 남자의 양복을 입는 여자가 만히 잇스나 조선에서는 남자와 갓치 살어보겟다는 무슨 주의와 리상을 가지고 머리를 깍근 녀자는 이 여자가 처음이다. 그 녀자는 과연 누구이며, 그의 머리 깍근 리유는 과연 무엇인가.

그 여자는 원래 한남권번(漢南券番·한남권번)에 잇든 강향란(姜香蘭·강향란)(二二·이이)이라는 기생으로, 사오 년 전에는 경성 화류계에 일홈이 놉하서 화류계에 출입하는 남자로는 그를 아지 못하는 자가 업섯스며, 그리고 그의 한번 웃고 한번 노래하는 아양은 여러 풍류 남자로 하야금 그의 정신을 취케 하엿다. 그러나 그 녀자는 비록 화류계에 몸을 더젓슬지라도 사람으로 생긴 이상에는 다만 하로라도 사람답게 살고 의미잇게 살고저 만히 헤매엿스며 만히 애를 썻다고 한다.

그러자 재작년 가을 어느 날 밤에 시내 모 료리뎜에서 엇던 쳥년 문사(靑年文士·청년 문사)와 술을 마시고 달을 희롱하며 자미잇게 이야기하다가 맛츰내 그 남자와 장래를 언약하고 그 해 십일월에 기생업을 폐하엿다.

이리하야 그는 자긔의 장래에 만흔 복이 잇스리라고, 아름다운 꼿이 피리라고 고대하고 고대하면서 시내 적선고(積善洞·적선동)에 사는 김모(金某·김모)라는 남자에게 열심으로 글을 배웟스며, 작년 구월에는 비로소 시내 루하동(樓下洞·누하동)에 잇는 배화녀학교(培花女學校·배화여학교) 보통과 사학년에 입학하엿다.

그는 화려한 장래를 긔다리는 마음에서 어대까지든지 열성과 부지런을 다하야 힘써 공부를 하엿는대, 빠른 것은 세월이라 그 해 가을에 불것든 단풍과 나리든 눈이 스러저바리고 다시 새해가 와서 산과 들에 봄 긔운이 무르녹는 새 학긔를 당하야 그는 우등 성적으로 그 학교 고등과 일학년에 진급하엿다. (계속)



斷髮娘(단발랑) (二·이)

華麗(화려)한 空想(공상)은 一場(일장)의 春夢(춘몽)

죽자하든 한강 길도 허사

삭발은 마즈막 수단인가



배화녀학교(培花女學校·배화여학교) 고등과 일학년에 진급한 강향란(姜香蘭·강향란)은 더욱히 가슴에 뛰는 깃붐을 익이지 못하야 자긔는 승리(勝利·승리)의 꼿이 만발하고 수정(水晶·수정)의 시내(川·천)가 흐르는 아름답고 어엽분 벌판을 지나가는 행복 잇는 사람이라 하엿다.

이리하야 그는 열심에 열심을 더하고 부지런에 부지런을 더하야 밤을 새어가며 힘써 공부하엿는대 어언간 산과 들을 곱게 단장하엿든 꼿은 부질업시 부러오는 느진 봄바람에 그만 애처러히 떠러저 바리고 여름이 되야 이곳저곳에 푸른 물방울이 떠러질 듯한 록음(綠陰·녹음)이 가득하게 되얏다.

장래의 향복을 꿈꾸고 공부만 하기에 딴 생각이 업셧스나 그러나 세상 일이라는 것은 모다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평디에 바람이 불고 꼿봉아리에 밋친 서리가 나리는 것은 세상에 흔히 잇는 일인가보다. 그에게는 꿈에도 생각지 아니하엿든 무서운 벼락이 그의 머리 우에 떠러젓다.(그 내용은 특별히 쓰지 아니한다.) 이것은 지나간 륙월 십일일의 일이엿다.

그는 그날 오후에 시내 통동 칠십일번디(通洞·통동)에 잇는 그의 주인집에서 대략 세 시간 동안이나 그 집 뒤문을 여러노코 인왕산(仁王山·인왕산) 머리에 붉은 저녁노을을 하염업시 바라보며 어름과 가치 싸늘한 사회의 무정을 한업시 저주하고 한업시 원망하다가 필경은 이러한 세상에서 눈물을 흘니고 한숨을 쉬면서 고생사리를 계속하는 것보다는 찰하리 저 세상으로 가는 것이 조타고 하엿다.

『섹스피|어』의 말과 가치 약한 자는 여자이라, 돌연히 큰 변을 당한 강향란은 이후에는 다시 사라갈 길이 업스며 또는 자긔의 장래는 눈물과 한숨으로 채운 거츠른 벌판과 갓다 하엿다. 이리하야 그는 맛츰내 죽기로 결심하고 그의 주인인 김충자(金忠慈·김충자)라는 부인에게 (前文略·전문 약) 만흔 사랑에 대하야 한 푼의 공로도 갑지 못하고 슯히 세상을 떠나오니 엇지 죽어 오른 귀신이 되겟슴니까. 그러나 박명한 이 사람은 이 괴로운 세상에서 더 사라잇슬 수가 업사옵기로 최후의 생명을 끈흐랴고 주인 문을 떠나옴니다. 그러나 부탁할 것은 식비는 우리 집에서 청장할 터이오니 염녀마시옵고 나의 행장은 다른 사람이 손대이지 안케 하고 나의 집에 보내주시옵소서.(後文略·후문 약)

이러한 유서(遺書·유서)를 써노코 그날 오후 열시 경에 강향란의 초최한 그림자는 한강 텰교 우에 나타나게 되얏다. 이에 강향란은 한강 텰교 우에서 용용히 흐르는 푸른 물과 빗나게 반짜거리는 하날의 별이며 무섭게 떠드는 경성(京城·경성)의 시가를 번가라 보며 그는 눈물을 뿌려 자긔 치마를 적서가면서 무정한 세상을 몃천 번 저주하다가 에라! 세상만사를 그만 단념하여 바리자. 아! 나는 죽는다 하고 치마를 쓰고 물로 뛰여 드더가랴 할 때에 이는 하늘이 도아주심인지 그를 구원하는 신(神·신)이 뜻밧게 닛타낫다. 그에게 글을 가르처주든 김모라는 남자가 한강에 산보를 나왓다가 물로 뛰여 드러가랴는 그를 보고 마츰내 그의 치맛자락을 잡아다려 필경은 그를 구원한 것이다.

그 사이에는 두 사람 사이에 눈물과 피가 매친 설은 사정의 이야기가 이섯다. 이리하야 구원을 밧고 위로를 어든 강향란은 그날 밤에 시내 쳥진동 일백사십일번디(淸進洞·청진동)에 잇는 자긔 어머니 집으로 가서 밤이 새도록 모녀가 목을 놋코 슯히 울엇다 한다.

그러나 임의 구원을 바든 강향란은 언제던지 울기만 할 수는 업섯다. 그는 맛츰내 엇더한 결심을 하엿다. 나도 사람이며, 남자와 똑갓치 사라갈 당당한 사람이다. 남자에게 의뢰를 하고 또는 남에게 동정을 구하는 것이 근본으로부터 그릇된 일이다. 세상의 모든 고통은 자긔가 자긔를 아지 못한 곳이 잇다. 나의 고통도 내가 나를 아지 못하는 곳에 잇다 하엿다.

이리하야 그는 남자와 갓치 살어보겟다는 의미로 지나간 십사일 오후에 시내 광교(廣橋·광교)에 잇는 중국 리발관에서 머리를 깍고 남자의 양복을 입엇다. 배화학교에서는 머리 깍근 여자는 단일 수가 업다고 퇴학을 식혓슴으로 그는 방금 서대문 안에 잇는 정측(正則·정칙)강습소에 단닌다고 한다. 아 그의 압길은 과연 엇더할가. (끗)




현대문

단발 낭자(1)

화류계에서 학창생활에 머리 깎고 남복한 여학생

그는 한남 권번의 강향란



시대가 변하고 사회가 변함을 따라 유럽 각지에서 조수가 밀려오듯 도도하게 흘러들어오는 사상은 조선 청년들의 머리를 이리 흔들고 저리 흔들어 요사이 청년들의 마음은 실로 천 가지 만 가지 모양을 띠는 경향이 있다. 연애니, 여성해방이니, 사회주의니, 또 무엇이니 해 떠들고 야단치는 것도 실로 사회의 중대한 현상이거니와 요즘 경성 시내에는 어떤 여학생이 머리를 깎고 남자 양복에 캡 모자를 쓰고 이곳저곳 돌아다닌다 해 일반 사회에서는 이야기꽃을 피우게 됐다.

과연 반만 년 옛날부터 조선 여자들은 그의 머리를 제왕의 관처럼, 여자의 자랑거리로 여기기 때문에 산에 들어가 중노릇하는 여자 말고는 머리 깎은 여자가 한 명도 없었다. 그러나 이 머리를 깎은 여자는 산에 들어가 중이 되기 위해 머리를 깎은 것이 아니요, 자기의 신념과 이상을 위해 머리를 깎은 것이라 한다. 프랑스나 독일이나 기타 유럽 각국에는 모든 것을 남자와 똑같이 하며 살아보겠다는 뜻으로 머리를 깎고 남자 양복을 입는 여자가 많지만 조선에서는 남자 같이 살아보겠다는 모슨 신념과 이상을 갖고 머리를 깎은 사람은 이 여자가 처음이다. 그 여자는 과연 누구이며, 그가 머리를 깎은 이유는 과연 무엇인가.

그 여자는 원래 한남 권번에 있던 강향란(22)이라는 기생으로, 4, 5년 전에는 경성 화류계에 이름이 높아서 화류계에 출입하는 남자로 그를 알지 못하는 자가 없었으며, 그가 한번 웃고 노래하며 아양을 떨면 여러 풍류를 즐기는 남자들의 정신을 취하게 했다 한다. 그러나 그 여자는 비록 화류계에 몸을 던졌을지라도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하루라도 사람답게 살고, 의미 있게 살고자 많이 방황했으며 많이 애썼다 한다.

그러다 강향란은 재작년 가을 어느 날 밤, 시내 모 요리점에서 어떤 청년 문사와 술을 마시고 달을 희롱하며 재미있게 이야기하다 마침내 그 남자와 장래를 언약하고 그 해 11월 기생업을 그만뒀다.

이리하여 그는 자기의 장래에 많은 복이 있을 것이라고, 아름다운 꽃이 피리라고 고대하고 또 고대하면서 시내 적선동에 사는 김모라는 남자에게 열심히 글을 배웠으며, 작년 9월에는 비로소 시내 누하동에 있는 배화여학교 보통과 4학년에 입학하게 됐다.

그는 화려한 장래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어디까지든 열성과 부지런을 다해 힘써 공부했는데, 빠른 것은 세월이라 그 해 가을 붉은 단풍과 내리던 눈이 스러져버리고 다시 새해가 와 산과 들에 봄기운이 무르녹는 새 학기를 맞아 우수한 성적으로 그 학교 고등과 1학년에 진급했다. (계속)



단발 낭자(2)

화려한 공상은 일장춘몽

죽으려던 한강 길도 허사

삭발은 마지막 수단인가



배화여학교 고등과 1학년에 진급한 강향란은 더욱 가슴에 뛰노는 기쁨을 이기지 못해 자기는 승리의 꽃이 만발하고 수정의 시내가 흐르는 아름답고 어여쁜 벌판을 지나는 행복한 사람이라 생각했다.

이리하여 그는 열심에 열심을 더하고, 부지런에 부지런을 더해 밤을 새가며 힘써 공부했는데 어언 산과 들을 곱게 단장했던 꽃은 부질없이 불어오는 늦은 봄바람에 그만 애처롭게 떨어져버리고 여름이 되어 이곳저곳에 푸른 물방울이 떨어질 듯한 녹음이 가득하게 됐다.

장래의 행복을 꿈꾸며 공부만 하느라 다른 생각이 없었으나 세상일이라는 것은 모두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평지에 바람이 불고 꽃봉오리에 미친 서리가 내리는 것은 세상에 흔한 일인가보다. 꿈에도 생각지 않았던 무서운 벼락이 그의 머리 위에 떨어졌다. (그 내용은 특별히 쓰지 않는다.) 이것은 지난 6월 11일의 일이었다.

그는 그날 오후 시내 통동 71번지에 있는 그의 주인집에서 대략 3시간 동안이나 그 집 뒷문을 열어놓고 인왕산 머리의 붉은 저녁노을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얼음과 같이 싸늘한 사회의 무정을 한없이 저주하고, 한없이 원망하다 마침내 이런 세상에서 눈물 흘리고 한숨을 쉬며 고생살이를 계속하느니 차라리 저 세상으로 가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했다.

셰익스피어의 말과 같이 약한 자는 여자라 돌연 큰 변을 당한 강향란은 이후에는 다시 살아갈 길이 없으며, 자기의 장래는 눈물과 한숨으로 가득한 거친 벌판과 같다고 여겼다. 이리하여 그는 마침내 죽기로 결심하고 그의 주인인 김충자라는 부인에게 ‘…(전문 생략) 많은 사랑에 대해 한 푼의 공로도 갚지 못하고 슬피 세상을 떠나니 어찌 죽어서도 옳은 귀신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박명한 이 사람은 이 괴로운 세상에서 더 살 수가 없어 최후의 생명을 끊으려고 주인 문을 떠납니다. 그러나 부탁하고자 하는 것은 식비는 우리 집에서 다 갚을 것이니 염려마시고 내 물건들은 다른 사람이 손대지 않게 해주시고 내 집에 보내주십시오. …(후문 생략)

이런 유서를 써놓고 그날 오후 10시경 강향란은 한강철교 위에 초췌한 그림자를 나타내게 됐다. 강향란은 한강철교 위에서 조용히 흐르는 푸른 강물과 빛나게 반짝이는 하늘의 별, 무섭게 떠드는 경성 시가를 번갈아보며 눈물을 뿌려 자기 치마를 적셔가며 무정한 세상을 몇천 번 저주하다 에라! 세상만사를 그만 단념해버리자. 아! 나는 죽는다 하고 치마를 쓰고 물로 뛰어 들어가려 할 때 하늘의 도우심인지 그를 구원하는 신이 뜻밖에 나타났다. 그에게 글을 가르쳐주던 김모라는 남자가 한강에 산보 나왔다가 물로 뛰어들려는 강향란을 보고 마침내 그의 치맛자락을 잡아당겨 마침내 그를 구원한 것이다.

그 사이에는 두 사람 사이에 눈물과 피가 맺힌 서러운 사정 얘기가 있다. 이리하여 구원을 받고 위로를 얻은 강향란은 그날 밤 시내 청진동 141번지에 있는 자기 어머니 집으로 가서 밤이 새도록 모녀가 목 놓아 슬피 울었다 한다.

그러나 이미 구원을 받은 강향란은 언제까지나 울기만 할 수는 없었다. 그는 마침내 어떤 결심을 했다. 나도 사람이다. 남자와 똑같이 살아갈 당당한 사람이다. 남자에게 의지하고, 남에게 동정을 구하는 것은 근본부터 그릇된 일이다. 세상의 모든 고통은 자기가 자기를 알지 못하는 것에 있다. 나의 고통도 내가 나를 알지 못하는 데 있다고 했다.

이리하여 그는 남자와 똑같이 살아보겠다는 뜻으로 지난 14일 오후 시내 광교에 있는 중국 이발관에서 머리를 깎고 남자의 양복을 입었다. 배화학교에서는 머리 깎은 여자는 다닐 수 없다며 퇴학을 시켰으므로 그는 얼마 전부터 서대문 안에 있는 정칙강습소에 다닌다고 한다. 아! 그의 앞길은 과연 어떠할 것인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