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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스 사망 이후 애플은 왜 더 강한가[오늘과 내일/하임숙]

입력 | 2020-08-24 03:00:00

제품 혁신 뛰어넘어 생태계 혁신 이뤄… 훌륭한 리더는 업의 정의를 바꾸기도




하임숙 산업1부장

“더 이상 혁신은 없을 것이다. 애플은 추락할 일만 남았다.”

2011년 10월 스티브 잡스가 사망했을 때 많은 전문가는 이렇게 예측했다. 혁신의 아이콘이자 애플 그 자체였던 잡스의 뒤를 이은 팀 쿡이 제2의 잡스가 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전제로 한 예측이었다. 실제로 그는 제2의 잡스가 되지 않았다. 다만 독보적인 쿡이 됐을 뿐이다.

지난주 금요일 미국 나스닥 증시에서 애플의 시가총액은 종가 기준으로 2조1270억 달러였다. 시총 2조 달러를 넘은 건 미국 기업으로 최초, 세계에선 중동 석유기업 아람코 이후 두 번째다. 잡스 사망 즈음 애플의 시총이 3500억 달러였으니 9년 사이 6배로 뛰었다. 그 기간 동안 애플 매출액은 3배로, 아이폰만 따로 떼어낸 매출은 5배로 뛰었다.

실제로 아이폰 자체의 혁신은 크게 없었던 이 시기에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애플은 더 강해졌을까. 답은 이렇다. 애플은 혁신으로 퀀텀점프를 이뤘다. 다만 혁신의 분야가 휴대전화 제조·디자인에서 휴대전화를 둘러싼 서비스 생태계 구축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애플은 더 이상 휴대전화를 만들어 파는 회사가 아니다. 과거에도 휴대전화의 핵심 개발능력과 디자인만 회사에 두고 제조는 폭스콘에 맡겼으니 삼성전자 같은 정통 제조업체와 달랐지만 지금의 애플은 제조업의 겉모습을 한 종합 서비스 기업이다. ‘애플 피플’을 거느린 거대한 공화국의 지배자다. 애플 공화국민들은 애플 안에서만 영화를 보고 게임을 하고 쇼핑을 하고 비행기를 예약한다. 버크셔해서웨이의 워런 버핏 회장은 “애플은 더 이상 기술주가 아닌, 일반 소비자와 밀접한 소비재 기업”이라고까지 했다.

같은 아이디를 이용할 경우 새 아이폰으로 바꾸더라도 자신이 아이폰을 이용하기 시작한 시점부터 지금까지의 역사가 고스란히 남는다. 마치 어린 시절 사진첩을 버릴 수 없듯이 아이폰에서 안드로이드로 갈아타기 힘들다. 애플 공화국민들은 애플이 제공하는 앱스토어에서 애플에 수수료 30%를 군말 없이 내는 전 세계의 훌륭한 앱들을 내려받아 누적된 역사에 또 다른 역사를 추가한다. 앱 개발사가 30% 수수료가 너무 큰 부담이라며 자체 결제시스템으로 갈아타려 하면 이 앱은 바로 애플 공화국에서 사라진다. 앱 개발사가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의 감시자 ‘빅 브러더’가 따로 없다며 공격해도 애플 공화국민들은 크게 상관하지 않는다. 이미 생태계에 길들여졌고 그 한두 개 앱이 없어진다 하더라도 누릴 수 있는 다른 혜택이 크기 때문이다. 애플에 주기적으로 돈을 내는 이용자는 5억5000만 명으로 1년 전보다 1억3000만 명이 늘었다.

이 같은 생태계 구축 시도가 잡스 생전에 없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잡스는 천재적인 기질을 가졌고 추앙받는 걸 당연시했기 때문에 제품의 혁신으로 세계를 놀라게 하는 걸 즐겼다. 2010년 기준 애플의 서비스 매출은 아이폰 매출의 7.5%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난해 말 기준으로 이 비중은 22%를 넘어섰다. 쿡 덕분이다.

쿡은 2007년부터 최고운영책임자(COO)로 애플의 안살림을 맡은 공급망 관리 전문가다. 애플이라는 기업이 실제로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잡스보다 쿡이 더 잘 알았을 것이다. 쿡이 생태계 구축이 애플의 미래라고 본 건 이처럼 우연이 아니다. 잡스가 살아 있었다면 어쩌면 애플은 여전히 세계 최고의 혁신적 제품을 내는 회사에 머물렀을 수 있다.

성공한 기업의 발목을 잡는 건 기존 성공의 경험인 경우가 많다. 쿡의 애플은 이 함정을 뛰어넘었다. 리더는 조직을 단숨에 멍들게도 하고 흥하게도 한다. 업의 정의까지 바꾸는 훌륭한 리더를 일찌감치 가진 건 애플의 행운이다.

하임숙 산업1부장 arteme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