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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청희의 젠틀맨 드라이버]100년 전통 ‘애스턴 마틴’-신생 ‘이네오스’, 럭셔리 SUV에 도전장

입력 | 2020-08-21 03:00:00

영국 럭셔리 차 브랜드 ‘애스턴 마틴’
쿠페 등 주력인 스포츠카서 벗어나 소비자 저변 넓히기 위해 ‘DBX’ 출시
설립 3년차 ‘이네오스 오토모티브’… 랜드로버 디펜더 재현한 ‘그레나디어’
생산 전부터 법적분쟁 등 세간의 주목




DBX는 애스턴 마틴의 첫 SUV로서 중요한 의미가 있는 모델이다. Aston Martin Lagonda Limited 제공

류청희 자동차 칼럼니스트

럭셔리 자동차 브랜드들은 오랫동안 전통을 중시하며 세단이나 쿠페 등 ‘보수적’ 장르에 집중했다. 그러나 그런 분위기는 21세기 들어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럭셔리 차를 소비하는 사람의 라이프스타일 변화에 발맞춰 SUV 분야로 진출하는 브랜드가 늘고 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최근 새로 선보인 두 종류의 럭셔리 SUV가 상반되는 철학과 개념으로 눈길을 끌고 있다. 하나는 100년 넘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애스턴 마틴이 내놓은 DBX이고, 다른 하나는 신생 업체인 이네오스가 정통 SUV 개념을 계승 발전시켜 만든 그레나디어다.

애스턴 마틴은 그동안 줄곧 쿠페와 컨버터블을 중심으로 스포츠카 만들기에 주력해온 영국 럭셔리 차 브랜드다. 남다르고 개성 있는 디자인과 주행 특성 등으로 고정 팬을 거느려온 애스턴 마틴은 줄곧 크지 않은 규모를 유지해 왔다. 그러나 지난 십여 년간 경영에 어려움을 겪으며 스포츠카 중심의 모델 구성을 고집하는 것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깨달았고, 폭넓은 소비자를 끌어안기 위해 2015년부터 야심차게 개발한 모델이 바로 DBX다.

DBX는 여러 면에서 애스턴 마틴에 의미가 크다. 애스턴 마틴이 역사상 처음 만들어 판매하는 SUV라는 것은 물론이고, 2013년부터 협력 관계를 맺은 다임러(메르세데스벤츠 브랜드를 소유하고 있는 독일 업체)의 기술이 개발 시작 단계부터 반영된 신세대 모델이라는 점도 중요하다. 영국 웨일즈주 세인트 아탄에 새로 지은 공장에서 생산되는 첫 모델이기도 하다.

정통 SUV보다는 승용차 분위기에 가까운 실내. 주행 특성도 스포츠카에 가깝다는 평이 있다. Aston Martin Lagonda Limited 제공

애스턴 마틴은 보도자료를 통해 지난 7월 9일 세인트 아탄 공장에서 DBX의 본격 생산이 시작됐다고 밝혔다. 원래 더 일찍 생산을 시작할 계획이었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거의 모든 활동이 차질을 빚으면서 일정이 미뤄진 것이다. 계획보다 늦어지긴 했지만, 완성된 차들이 나오면서 이달 초부터 유럽을 중심으로 여러 자동차 매체의 시승기가 공개되고 있다.

올해 2월 국내에서도 처음 공개돼 예약 판매를 시작한 바 있는 DBX는 누가 봐도 애스턴 마틴임을 알 수 있을 만큼, 최신 애스턴 마틴 스포츠카를 닮은 우아하고 스포티한 디자인이 돋보인다.

DBX가 각진 차체와 존재감을 부각시킨 다른 럭셔리 브랜드 SUV와 차별화되는 점은 좀 더 일반 승용차에 가까운 승차감과 주행특성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애스턴 마틴은 브랜드 고유의 스포티함을 SUV에도 구현했다고 주장한다.

기본 뼈대는 스포츠카인 밴티지의 것을 키웠지만 날렵한 겉모습에 비해 넉넉한 실내 공간을 갖춘 게 특징이다. 엔진과 변속기 등 달리기에 관련된 부분은 메르세데스벤츠의 것을 활용했다. V8 4.0L 트윈터보 가솔린 엔진은 최고출력이 550마력이고, 정지 상태에서 시속 100km까지 가속하는 데에는 4.5초가 걸린다. 전자제어 서스펜션은 엔진 및 변속기와 연계돼 주행 조건과 운전자의 선택에 따라 차의 주행 특성을 알맞게 조절한다. SUV라는 새로운 장르에 도전하면서도 오랜 전통을 바탕으로 쌓아온 애스턴 마틴의 개성을 이어나갈 수 있도록 최신 기술을 한껏 담은 차가 DBX인 셈이다.

럭셔리 SUV라는 주제를 놓고 DBX와는 반대되는 개념으로 접근한 차가 이네오스 그레나디어다. 그레나디어를 만든 이네오스 오토모티브는 설립된 지 겨우 3년 된 업체로, 그레나디어는 이네오스가 만들 첫 모델이다. 심지어 아직 생산이 시작되지도 않았을 뿐더러 어느 곳에서 생산할지도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레나디어가 주목받는 이유는 지프 랭글러와 더불어 정통 오프로더(험로 주행에 특화된 네바퀴굴림 차)의 대명사로 꼽히는 랜드로버 디펜더를 재현한 모습 때문이다.

디펜더는 이미 잘 알려진 대로 랜드로버 70년 역사를 상징하는 대표적 모델이다. 오랜 세월 개선을 거듭해 2016년까지 생산된 디펜더는 랜드로버가 올해부터 과거와 전혀 다른 설계와 모습으로 현대화된 새 모델을 판매하면서 제2의 역사를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워낙 옛 모델이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만큼, 새 모델에 대한 반응은 극과 극으로 갈린다. 현대화된 디펜더에 대한 기대도 크지만, 옛 디펜더를 그리워하는 정통 오프로더 애호가도 적지 않다.

사실 그레나디어의 탄생도 디펜더에 대한 향수에서 시작됐다. 이네오스 오토모티브의 모기업인 이네오스는 영국을 기반으로 하는 다국적 화학기업으로, 창업자인 짐 래트클리프 경은 자동차 애호가로 디펜더의 열렬한 팬이기도 하다. 그는 오리지널 디펜더가 단종된다는 소식을 접하고 아쉬움에 디펜더의 역사를 이어갈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랜드로버와 접촉해 디펜더 생산 시설을 인수하는 것을 논의하기도 했지만 성사되지 않았고 결국 디펜더의 디자인과 성격을 되살린 차를 직접 만들기로 했다. 창업자의 애정이 디펜더의 복각판을 새롭게 만드는 계기가 된 셈이다.

물론 디펜더를 만든 랜드로버가 지적재산권 침해로 이네오스를 제소하면서 법적 분쟁으로 번졌다. 4년여에 걸친 분쟁은 최근 영국 고등법원에서 디펜더의 디자인이 ‘상표화할 만큼 독특한 디자인이 아니다’라는 원심 판결을 확정하면서 마무리되었다. 이네오스가 걱정 없이 그레나디어를 생산할 길이 열린 것이다.

그레나디어는 랜드로버가 제소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만큼 오리지널 디펜더와 판박이처럼 닮았다. 평평한 유리와 단순한 모습의 상자형 차체, 가운데가 불거진 보닛과 사각형 틀 바깥쪽에 놓인 한 쌍의 원형 헤드램프, ‘알파인 루프 윈도’라고 불리는 지붕 모서리의 쪽창 등 디펜더의 특징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디펜더에 명성을 안겨준 탁월한 험로 주행 능력은 새로운 기술과 더불어 그레나디어에서 한층 더 강화된다. 충돌 안전성을 고려해 설계한 사다리꼴 프레임, 험로 주행 능력을 높여주는 서스펜션 등 안에 담긴 것들은 완전히 새롭다. 엔진과 변속기는 BMW의 것을 쓰고, 네바퀴굴림 장치는 메르세데스벤츠 G-클래스를 비롯해 험로용 특수차 개발에 일가견이 있는 오스트리아 마그나 슈타이어와 손잡고 개발한다. 극도로 침체된 지동차 시장 환경 때문에 미래가 불투명하지만 그레나디어는 SUV의 고전적 모습과 개념을 현대적 기술을 통해 재현했다는 점에서 화제가 되기에 충분하다.

이처럼 럭셔리 SUV라는 하나의 장르 안에서도 브랜드마다 접근방식과 개념이 다르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취향과 개성이 중요한 럭셔리 차에서 이처럼 서로 다른 개성을 뽐내는 차들 덕분에 소비자는 더 큰 선택의 즐거움을 느낄 것이다.

류청희 자동차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