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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원과 선식[김인현의 바다와 배, 그리고 별]〈34〉

입력 | 2020-07-03 03:00:00


김인현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선장

선박에는 20여 명의 선원이 승선하여 생활하고 있으니 먹을 것이 필요하다. 항구에 들를 때마다 쌀 고기 야채 식수 등을 실어야 한다. 세계 각국을 다니니까 싼 곳에서 필요한 것을 많이 실어둘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미국 서안에서는 오렌지와 고기 그리고 쌀을 싣는다. 현지 시장을 방문하여 식품을 구입하는 때도 있지만 이런 경우는 오히려 드물다. 이런 식품을 공급해 주는 현지 상인을 선식(船食), 이들이 운영하는 회사를 선식회사라고 부른다. 선식이 배에 올라와서 선장과 상의하여 주문을 받은 다음 출항 전 주문된 부식을 가져다준다. 부식이 올라올 때는 선원들이 구경하려고 모여든다. 선상 생활 중 식사는 선원들의 큰 관심 사항이기 때문이다.

한국 선원들이 본격적으로 세계를 누비기 시작한 1970년대 이후 기항지에 현지 선식이 필요하다는 점을 느낀 한국 선원들 중 일부는 현지에 정착해 선식업을 개척했다. 일본, 미국 서부, 남미, 호주, 유럽, 아프리카 등 세계 각국으로 우리나라 선원들이 개척한 선식업이 뻗어나갔다. 선식업에서 기반을 잡아 다른 사업까지 확장하여 현지에서 성공한 사람들도 여럿 있다. 그래서 한국해양대에는 항해학과, 기관과 말고 선식학과가 있다는 우스갯말이 생겨났다.

현지 사정에 정통한 선식은 우리 선원들에게 다양한 기능을 제공했다. 선식은 선원들이 외국 항구에 구경을 나갈 때 교통수단을 무료로 제공했다. 외국어에 서툰 선원들은 온갖 잡다한 질문과 부탁을 선식에게 한다. 아내에게 선물할 화장품을 사려는데 어디에 가면 되는지 물어보거나 오디오 카세트를 파는 곳에 데려다 달라는 등의 부탁을 한다. 그리고 출항 때는 고국에 보내는 편지를 내민다. 선식들은 이런 일에 대해 마다하지 않고 서비스를 제공했다.

선식은 이 배 저 배 다니면서 메신저의 역할도 했다. 1989년의 어느 흐린 날 나는 1등 항해사로 캐나다 밴쿠버에서 일본으로 향하는 각재(角材)를 싣고 있었다. 5년 선배인 한 선식이 우리 배에 올라왔다. 우리 선단의 다른 배가 이웃 부두에 접안했는데 선장이 1등 항해사가 일을 너무 모른다고 불평을 한다고 했다. 그러니 나한테 그 배에 한번 가서 도와주라는 것이었다. 대학 1년 후배가 1등 항해사였다. 육상 근무를 하다가 다시 배를 탔는데 각재 적재는 처음이라서 어려움이 있다고 했다. 나는 그에게 이런저런 조언을 하고 배로 돌아왔다.

그로부터 6년이 지나 내가 로펌 근무를 시작한 첫날, 이 후배가 거래처 대형 보험회사에 차장으로 근무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반가웠다. 그는 그때 일을 고맙다고 말하며 보험 사건 처리를 의뢰하였다. “쉽게 해결이 될 것입니다”는 말과 함께…. 전화 몇 번으로 사건은 쉽게 해결되었고 우리 로펌은 보험사로부터 상당한 보수를 받았다. 이 일을 계기로 나는 로펌에서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캐나다 밴쿠버의 선배 선식이 맺어준 인연 덕분이었다.

한국 선원들의 애환을 함께한 선원 출신 선식들은 우리나라 해운산업 성장 과정에서 밑거름 같은 역할을 했다. 10년 승선 기간 중 이들이 제공한 다양한 서비스에 도움을 받은 나도 이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늘 가득하다.

김인현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선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