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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상’ 목마른 韓…“무명 과학자의 아이디어가 노벨상 된다”

입력 | 2019-09-25 07:09:00


1991년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은 에르빈 네어 막스플랑크 생물물리화학연구소 명예교수.(한국뇌연구원 제공)

“훌륭한 과학적 아이디어는 누구에게서 나올지 모릅니다. 그게 이름 모를 과학자일 수도 있으며, 아주 어린 청년과학자일 수도 있어요.”

1991년 세포 이온채널의 기능을 발견한 공로로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한 에르빈 네어(74) 막스플랑크 생물물리화학연구소 명예교수는 지난 23일 대구 엑스코에서 열린 ‘세계뇌신경과학총회’(IBRO 2019)에 참가한 후 <뉴스1>과 단독 인터뷰를 갖고 이같이 말했다.

1980년대부터 지금까지 거의 스무번 가량 한국에 방문했다는 네어 교수는 한국 과학자들과의 교류도 잦고 그만큼 국내 기초과학 연구 현황에도 관심이 깊다. 네어 교수는 우리나라 기초과학에 대한 투자 현황, 청년과학자에 대한 지원 등 자신이 알고 있는 한국 과학기술 정책에 대한 제언을 쏟아냈다. 퇴직했지만 여전히 연구에 대한 열정이 식지 않은 그다. 자신의 연구를 소개할 때는 눈에서 빛이 날 정도였다. 연구하지 않는 여가 시간에는 무엇을 하는지까지 직접 들어봤다.

◇韓기초과학 수준 높아…“여러 사람에게 기회줘야, 젊은 과학자 스스로 훈련할 수 있어야”

네어 교수는 올해 유력한 노벨생리의학상 수상 분야로 ‘광유전학’과 ‘유전자 가위 크리스퍼’를 꼽았다. © 뉴스1

네어 교수는 “한국의 기초과학 수준은 높다”고 평가하면서도 “하향식(탑다운식·Top-down) 목표를 제시하는 것이 연구를 기획하고 수행하기에는 효율적이지는 모르지만 노벨상 수상 분야와 같이 특별한 아이디어를 내기 위해서는 좋지 않다”고 말했다. 이어 “연구자들이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개인 연구를 지향할 때 이 같은 아이디어가 나오며, 이미 답을 알고 지시를 내리는 풍토가 아닌 스스로 새로운 아이디어를 개발하는 연구 풍토가 갖춰졌을 때 노벨상이 가능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같은 조언을 하는 네어 교수에게서는 한국을 생각하는 진심이 느껴졌다. 그러면서도 어떤 과학자에게 기회를 줘야 하는지도 언급했다. 그는 “매우 출중한 과학자 한 명에게만 투자하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정말 혁신적인 아이디어는 이름 모를 과학자나 젊은 과학자가 낼 수도 있다”면서 “몇몇 사람한테 집중하는 것도 좋지만 폭넓게 저변을 확대해 기초과학을 할 기회를 여러 사람에게 주는 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특히 젊은 과학자를 육성해야 한다면서 좀 더 구체적인 정책을 제시했다. 네어 교수는 “박사 학위를 받고, 박사후과정(포닥) 생활을 한 2~3년을 거친 젊은 과학자들은 반드시 독립적인 주제를 가지고 연구를 할 수 있게 해야 한다”면서 “스스로 성장할 수 있는 일종의 교육과 훈련을 해야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독일인 네어 교수는 독일의 젊은 과학자 육성 제도를 직접적으로 언급하기도 했다. 그는 “사실 그 단계에 홀로서기를 하기는 쉽지 않지만 독일에서는 프로그램으로 만들어서 하고 있다”면서 “독일에서는 5명 정도로 구성된 젊은 연구자들이 연구그룹을 만들고 이 사람들이 직접 자기 랩을 꾸릴 수 있도록 지원한다”고 말했다. 일종의 ‘트라이얼 그랜트’다. 여기에 멘토들도 있지만 이들은 연구에 대해 관여하지 않고 연구 그룹의 행정이나 논문 출판 등을 돕는 일을 한다고 네어 교수는 부연했다.

◇노벨상 수상 성과 신약개발로 이어져…올해 수상 유력분야 ‘광유전학’·‘유전자 가위’ 꼽아

네어 교수는 최근 자신이 연구하고 있는 인간의 두뇌 활동의 근원인 ‘신경전달물질’ 연구 분야를 소개했다.(한국뇌연구원 제공)

네어 교수는 1991년 각각 살아있는 세포는 세포 내부와 외부를 분리하는 막으로 둘러싸여 있고 이 세포 사이에 뚫린 미세한 통로를 통해 나트륨이나 칼륨 등의 이온 통로가 존재한다는 것을 밝힌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자가 됐다. 당시 기초과학 수준에서의 연구성과였지만 28년이 지난 지금은 질병을 극복하는 연구에까지 성과가 활용되고 있다.

이처럼 노벨과학상을 수상한 연구 기초과학 분야 연구성과들은 시간이 다소 흐른 후 인류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결과를 가져온다. 네어 교수는 “이온 통로가 어그러지거나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하면 질병이 발생할 수 있다”면서 “새로운 질병의 치료제, 신약을 개발하고 치료제의 부작용을 줄일 수 있는 등의 활용으로 이어지고 있음에 뿌듯함을 느낀다”고 말했다.

특히 그가 꼽은 자신의 기초연구 활용 성과로는 ‘소아 당뇨’에 대한 연구를 꼽았다. 그는 “옥스퍼드대에서 소아 당뇨에 활용할 수 있는 신약을 개발하고 있다”면서 “이온 통로에 변화가 생겼을 때 이 기능을 정상적으로 되돌리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으며 개발이 완료되면 소아 당뇨에 환자들에게 희소식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오는 10월 2019년 노벨과학상 수상자 발표를 앞둔 가운데 네어 교수에게 생리의학상 수상의 가능성이 있는 연구 분야를 묻자 그는 ‘광유전학’(optogenetics)과 ‘유전자 가위 크리스퍼’(CRISPR)를 꼽았다. 광유전학은 빛으로 생체조직 세포들을 조절할 수 있는 생물학적 기술을 말하며, 크리스퍼는 유전자의 특정 서열을 인식해 자르거나 편집할 수 있는 기술을 말한다. 그는 “확신할 수는 없지만 광유전학과 유전자 가위 기술이 유력하지 않을까”라고 웃으며 답했다.

◇“여전한 연구 열정”…취미는 모형 수력발전기 만들기

네어 교수가 노벨상을 받은 지 어느덧 28년이 됐지만 그의 연구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았다. 노벨상이 자신의 연구 목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나는 여전히 기초과학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면서 자신이 현재 연구 중인 내용을 빛이나는 눈빛으로 소개했다.

최근 네어 교수는 인간의 두뇌 활동의 근원인 ‘신경전달물질’을 연구하고 있다. 동물의 시냅스소낭 중에는 다음번 신경세포로 신호가 전달되도록 통로 근처에서 칼슘이온에 빠르게 반응하는 ‘준비된즉각분비시냅스소낭’(PPR) 세포가 존재한다. 네어 교수는 지난 2013년 서울대 연구진들과 함께 인간 두뇌 속에 있는 ‘시냅스 소낭’이라는 신경세포에서 신경전달 물질을 분비하는 과정을 알아내기도 했다.

PPR은 작은 자극에도 빠르게 반응할 수 있는데, 기존보다 더 작은 반응에도 빠르게 반응할 수 있는 상태를 ‘슈퍼프라임’(super prime)이라고 한다. 최근 네어 교수는 슈퍼프라임 상태에 관심이 많다. 뇌 신경세포에서 신호를 전달하는 핵심 역할을 맡는 단백질 ‘MUNC13’는 RRP과정에 관여하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네어 교수는 ‘MUNC13’와 슈퍼프라임의 상관성을 연구하고 있는 것.

이러한 모든 과정은 결국 인간의 뇌의 상태에 영향을 미칠 수 있어 이 연구 분야는 매우 중요하다고 네어 교수는 보고 있다. 여기서 얘기하는 뇌의 상태는 흥분 상태, 각성 상태, 차분한 상태, 잠을 자는 상태 등 모든 상태를 포함한다. 이 연구 분야는 아직 국내에서는 생소한 분야다.

네어 교수는 “슈퍼프라임에 대한 이론은 내가 제시한 것은 아니다”라면서 “기존에는 시냅스에서 긴 시간 반응하던 ‘롱텀’연구에서 짧은 시간 반응하는 ‘숏텀’ 연구(단기시냅스)가 다수 이뤄지고 있고, 이 분야는 최종적으로 뇌의 상태를 파악할 수 있는 기작을 밝히는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연구하지 않고 쉬는 시간에는 취미로 모형의 수력발전기를 만든다. 네어 교수는 “어릴 때부터 흐르는 물을 보고 댐이나 물로 발전하는 게 궁금했다”면서 “요즘은 시간이 날 때 재미로 모형 수력발전기를 만들어보고 있다”고 취미생활을 공개했다.

(대구=뉴스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