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여학생들 日교사 턱 앞에 두 손 들이대고 “대한독립 만세”

입력 | 2019-03-16 03:00:00

[2019 3·1운동 임정 100년, 2020 동아일보 창간 100년]
3·1운동 100년 역사의 현장 2부 <제44화>서울 경성여고보




1919년 3월 1일 서울 여학생들이 독립만세를 외치며 전찻길 옆을 행진하는 모습. 사진 속 여학생들은 경성여고보생들로 추정된다. 수원대 박환 교수에 따르면 이 사진은 일본 오사카아사히신문 1919년 3월 5일자에 실린 것으로 한때 ‘기생 시위 사진’으로 오해받기도 했다. 당시에는 여학생들이 사진 속 머리 차림새처럼 ‘히사시가미’라는 스타일로 꾸미는 게 유행했다. 안영배 기자 ojong@donga.com

“(1919년 1월 21일 광무황제께서 붕어한 이후) 2개월간 우리는 여러 준비를 하였다. 학우의 주소를 조사하며, 재정을 구취(鳩聚)하며, 일인(日人)의 눈을 피해 비밀히 동지를 단속하였다. 혹 (불을) 때는 아궁이 앞에 널짝을 놓고 그 밑에 들어가 가만히 한마디 두 마디씩 연락을 하여 주기로 하였다가, 3월 1일 오전을 당하여 어린아이 큰사람 할 것 없이 ○○○○ 하나씩 둘씩 끌고 가서 오늘 할 일을 일러주었다. 그래도 천연스럽게 하오 1시가 될 때까지는 참고 공부하기로 하였다.

‘불의(不義)코 백년 살지 말고 의(義)코 하루 살아라’를 변소 벽에 기록하고 한 사람씩 가보게 한다. 하오 1시경에 독립선언서 1장이 들어왔기로 몰래 들여다보고 있을 때 탑골(탑동)공원에서 독립만세 소리가 천지를 울리다.”(상하이판 독립신문 1919년 10월 16일, ‘여학생 일기’)

이 글은 상하이(上海) 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에 수록된 ‘여학생 일기’의 한 부분이다. ‘심원(心園)여사’란 필명으로 작성된 일기는 3·1운동을 기획하고 현장을 경험한 여학생의 육성을 고스란히 담고 있어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상경 KAIST 교수에 따르면 일기의 주인공은 당시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경성여고보·현 경기여중고교) 학생이던 김원경이다. 그는 3·1운동 직후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6차례에 걸쳐 독립신문에 일기를 연재했다.


○ 총독부가 관리하는 여학교

상하이판 독립신문 제16호(1919년 10월 2일자)에 실린 김원경의 ‘여학생 일기’.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제공

경성여고보는 1908년 한국 최초로 설립된 관립 여학교인 한성고등여학교의 후신으로, 1910년대 당시 조선총독부가 직할하던 유일한 여자고등보통학교였다. 전국의 수재와 문벌 있는 가정의 자녀들이 찾는 명문 학교였다.

총독부는 경성여고보를 여성 황국신민화 교육의 전초기지로 삼고자 했다. 주로 외국인 선교사들이 설립해 운영하던 이화, 배화, 정신 등 당시 경성의 사립 여학교들과는 달리 총독부가 주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경성여고보 교사 대부분은 일본인들로 채워졌고 한국인 여학생들은 철저한 감시와 통제 아래 식민지 교육을 받았다. 총독부는 2세 양육을 맡는 여성들에게 신민화 교육을 하면 자연스럽게 전체 한국인의 신민화가 정착될 것이라고 판단했다.(박용옥, ‘한국여성항일운동사연구’)

민족운동 진영은 이런 일제의 의도를 간파하고 경성여고보를 일제의 여성 신민화 교육의 실패 사례로 만들기로 했다.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박희도(당시 YMCA 간사)가 주도적으로 나섰다. 그는 1917년부터 경성여고보생들의 비밀조직 결성을 지도했는데 3·1만세운동 당시 300여 명의 전교생 가운데 42명이나 이 조직에 가담할 정도로 규모가 컸다.(최은희, ‘조국을 찾기까지’)

저항의식을 기른 여학생들은 일본인 교사들과 맞서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한국에서 일본을 ‘내지·內地’라고 표현하는 것은) 행랑것(한국)이 큰댁(일본)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고 설명하는 일본인 교사에게 여학생들은 “우리가 일본 사람의 행랑것들이에요?”라고 반박하기 일쑤였다. “일본 돈으로 조선이 산업화되었으니 고맙다고 절을 해야 한다”는 역사교사에게는 여학생들이 극도로 분노해 “피피피”라고 소리를 지르며 거세게 반발하기도 했다.(‘여학생 일기’)

경성여고보 출신 최정숙이 ‘소녀 결사대’라고 밝힌 경성여고보 비밀조직은 민족운동가들과 연락하며 3·1만세운동을 준비했다. 이 과정에서 본과생 최은희 김숙자 이양전과 사범과생 최정숙 강평국 고수선 등이 중심이 됐다.

특히 당시 25세의 ‘만학 처녀’로 학생들에게 “언니”로 불렸던 김숙자는 큰 지도력을 발휘했다. 이화학당과 영변의 숭덕학교에서 교편생활까지 경험한 김숙자는 일본 대학으로 유학하기 위해 경기여고보 3학년에 편입해 있었다. 그는 기숙사 복습실에서 한국 지도를 펼쳐놓고 ‘어린 동지’들에게 조국의 참모습을 일깨워줬고 취침시간에는 살며시 일어나 만세운동에 쓸 300여 장의 태극기를 제작했다.(김숙자 회고, 중앙일보 1976년 3월 1일)

그런데 3월 1일 새벽에 독립선언서 한 뭉치가 학교 담장을 넘어 운동장에 뿌려지는 일이 발생했다. 학교는 초비상이 걸렸다. 긴급 교직원회의가 열리고 학생들은 귀가를 봉쇄당한 채 학교에서 제공하는 빵으로 끼니를 때워야 했다. 기숙생들은 바깥출입이 금지됐다.

오후 1시에 탑골공원에 모이기로 한 약속을 지킬 수 없는 상황이 되자 학생들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이때 기숙생들 사이에서 “(교사들이 회의하는 틈을 타) 대문을 빠개자” 하는 고함이 터졌다. 검정 치마 밑으로 허리띠를 단단히 졸라맨 여학생들은 손도끼와 식칼, 돌멩이를 닥치는 대로 집어 들고 기숙사 후문을 부쉈다. 깨진 대문 조각들을 짓밟으며 학생들은 길거리로 쏟아져 나갔다. 죽음을 각오하고 나선 길이었기에 속옷에 주소 성명 학교 고향 부모 이름까지 써 붙인 학생(최정숙 회고)도 있었다.

오후 2시 경성여고보에서 남쪽으로 500여 m 떨어진 탑골공원에서는 이미 만세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여학생들은 탑골공원에서 선언식을 마치고 북상하는 군중에 합류해 경운동 천도교 중앙대교당을 거쳐 경성여고보 정문을 지나갔다. 교사들과 사환들은 학교 정문 앞에 나와 넋을 읽고 이 광경을 지켜볼 뿐이었다. 여학생들은 일인 교사들 턱 앞에 두 손을 바짝 들이대고 높은 소리로 “독립만세”를 통쾌하게 외쳤다.(최은희, ‘조국을 찾기까지’)

이날 시위로 경성여고보 전교생의 10%가량인 32명이 일본 경찰에 체포됐고 이 가운데 10여 명이 구금됐다. 하지만 경성여고보생들은 굴하지 않고 3월 5일 학생들이 주도하는 남대문역(서울역) 2차 시위에 다시 참가했다. 경성여고보 기숙생 전원(70여 명)은 이날 새벽 사감의 눈을 피해 기숙사를 빠져나가 시위에 참여했다. 이때 경성여고보생들은 ‘일편단심’을 의미하는 빨간 머리띠를 수천 개 만들어 경성고보 남학생들을 통해 각 학교에 전달해 사용하도록 했다.

두 차례에 걸친 경성여고보생 시위는 당시 장안에 큰 파문과 충격을 던졌다. 특히 일제 당국은 3월 1일 1차 시위에 관립인 경성여고보 전교생이 만세운동에 참가한 사실에 경악했다. 여성 신민화 교육이 실패했음을 보여준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 독립운동가로 변신한 여학생들

3·1운동에 놀란 조선총독부는 3월 10일 경성지역에 임시휴교령을 내린다. 추가로 있을 학생운동을 막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데 기여했다. 학생들은 귀향한 뒤 각 지방에서 펼쳐진 만세운동을 주도했고 열렬한 독립운동가로 변신했기 때문이다.

경성여고보생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김숙자는 휴교령에 고향인 평안북도 영변으로 내려간 뒤 1919년 8월 여성 비밀 독립운동 조직인 ‘대한애국부인회’ 평북조직책으로 활약하다 1921년 5월 일경에 붙잡힌다. 그의 활약상은 수원대 박환 교수가 최근 찾아낸 ‘매일신보’ 1921년 6월 24일자 기사 ‘여자 정치범 검거, 독립운동의 거괴(巨魁) 김숙자’에서 확인할 수 있다. 기사에 따르면 김숙자는 독립운동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체포됐다.

‘수원의 유관순’으로 불렸던 이선경은 수원 최초의 자생적 학생 결사조직인 ‘혈복단’(이후 ‘구국민단’)에 가입해 독립운동에 투신한다. 1920년 8월 일경에 체포된 이선경은 8개월 후 석방됐으나 고문의 후유증으로 풀려난 지 9일 만인 1921년 4월 21일 19세의 꽃다운 나이에 순국했다. 그는 “만일 석방된다면 다시 이 운동을 벌일 생각인가”라는 일경의 질문에 “그렇다. 석방돼도 다시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우겠다”며 신념을 굽히지 않다가 죽음을 부르는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신문기자로 활약하던 최은희는 1927년 한국 최초의 전국적인 여성운동 조직인 ‘근우회’에 참여해 민족운동을 이끌었다. 제주 출신의 여자 3인방 최정숙 강평국 고수선 역시 군자금 모집 등 항일운동, 문맹퇴치 교육 등에 헌신했다. 최정숙과 고수선은 훗날 독립유공자로 선정됐지만 강평국은 아직까지 서훈을 받지 못했다.

박환 교수는 “김숙자 강평국 등 과거 여성들은 자신의 공을 드러내지 않는 경향이 컸다”며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더 찾아내고 기리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 기개 높은 민족의식 서로 공감했나… 부부인연 맺은 민족운동가들 많아

3·1운동 후 낙향 교단에 선 김숙자, 독립운동가 언론인 장도빈과 결혼
‘여학생 일기’ 주인공 김원경은 상하이 임정 참여 최창식과 혼인

1919년 3·1운동 당시 경성여고보 교사. 현 서울노인복지센터(종로구 경운동 90)가 자리한 곳으로 당시 학교 정문은 운현궁을 마주 보고 있었다. 사진 출처 ‘경기여고100년사’

3·1운동은 여학생들과 남성 민족운동가들을 부부로 맺어주기도 했다. 남녀 구별이 엄격했던 당시 3·1운동 전개 과정에서 기개 높은 민족의식을 드러낸 여학생들이 독립 투쟁에 뛰어들었던 남성 운동가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섰기 때문이다.

‘재원 집합소’로 이름을 날리던 경성여고보 학생 김숙자(1892∼1979), 김원경(1898∼1981) 등이 대표적이다.

김숙자 지사는 3·1운동 후 평안북도 영변으로 귀향해 교사 생활을 하던 중 1920년 7월 언론인이자 국사학자인 장도빈(건국훈장 독립장)과 결혼했다. 김 지사의 아들인 장치혁 전 고합 회장(87)은 “당시 노총각인 아버지(33세)와 노처녀인 어머니(28세)가 결혼의 인연을 맺은 것은 항일 독립운동이라는 공통분모가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김 지사는 독립운동가 집안 출신의 재원이었다. 그의 부친 김준찬은 광복군 사건으로 투옥 생활을 한 독립운동가였고(동아일보 1925년 11월 12일), 그의 남동생 김응원은 임시정부의 국내 조직인 ‘연통제’의 책임자로 활약하며 조선총독부 대관(大官)을 암살하려다가 체포됐다(동아일보 1922년 3월 3일).

‘여학생 일기’의 주인공인 김원경은 1919년 4월 ‘조선독립애국부인회’ 및 ‘혈성단’ 대표로 중국 상하이에 파견을 갔다가 독립운동가 최창식(건국훈장 독립장)을 만나 결혼했다. 오성학교 교사 출신인 최창식은 3·1운동 당시 서울에서 학생들과 함께 만세운동을 벌인 뒤 상하이로 망명해 임시정부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는 상하이판 독립신문 등을 발행하는 인쇄소를 운영하다가 김원경과 만난 것으로 알려졌다.

숙명여학교 출신 박자혜 지사(1895∼1943)도 3·1운동을 인연으로 결혼까지 했다.

조선총독부의원 산부인과 간호사로 일하던 박 지사는 당시 일본 군경에 무자비하게 진압당한 학생들을 치료하면서 일본을 위해 일한다는 사실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이후 간호사들로 구성된 ‘간우회’를 조직해 일제에 항거하다가 일경에 체포되기도 했던 박 지사는 중국으로 망명해 단재 신채호(건국훈장 대통령장)를 만나 결혼까지 한다. 박 지사와 단재는 1920년 우당 이회영의 부인 이은숙의 소개로 만난 것으로 알려졌다.

안영배 논설위원 oj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