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상 대기업이 다른 기업을 인수하면 CEO부터 교체하는 게 수순처럼 여겨졌다. 주로 ‘재무통’이나 ‘기획통’ 출신의 모(母)기업 임원이 CEO로 내정돼 피인수기업의 체질을 바꾸기 위해서다. 하지만 최근 들어선 하만의 사례처럼 기존 CEO를 유임시키고, 인수기업에서 더 중용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 피인수기업 CEO, 모회사 사업책임자까지
삼성전자는 하만의 이사진을 손영권 최고전략책임자(CSO·사장), 노희찬 최고재무책임자(CFO·사장), 노태문 최고기술책임자(CTO·사장) 등 자사 주요 임원으로 채우면서도 대표이사는 팔리왈 CEO를 유임시키고 있다. 전자업계에선 “팔리왈 CEO가 앞으로 수년 더 하만을 이끌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2017년 SK㈜가 LG로부터 사들인 SK실트론의 변영삼 대표 역시 SK그룹의 ‘세대교체’ 흐름 속에서도 자리를 지켰다. 지난 연말 인사에서 주요 계열사 CEO들이 줄줄이 50대로 교체됐지만 61세인 변 대표는 유임됐다. 변 대표는 LG실트론 시절인 2011년부터 CEO를 맡고 있어 SK그룹 내에서도 장수 CEO 반열에 오른 것으로 분류된다. 스타트업 시장에서도 비슷한 흐름이 나타난다. 대표적인 사례가 네이버가 2017년 인수한 명함관리 앱 리멤버(회사명 드라마앤컴퍼니). 창업자인 최재호 대표가 여전히 경영을 맡고 있다.
○ 기존 CEO 경영성과 활용·조직 안정
이 같은 흐름을 두고 기업의 인수합병(M&A)의 트렌드 변화에 따른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자산이나 설비 인수 같은 규모의 경제만이 아니라 피인수기업의 핵심 사업역량을 흡수하기 위한 M&A가 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장세진 KAIST 경영대학 교수는 “기존 사업과 고도의 시너지를 만들기 위해 ‘잘나가는 기업’을 사들이는 게 요즘 M&A 트렌드”라며 “피인수기업 CEO가 가진 능력을 활용할 필요성이 그만큼 높아졌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유임되는 피인수기업 CEO들은 공통적으로 뛰어난 성과를 내왔다. 팔리왈 CEO는 2008년부터 지금까지 회사를 이끌며 강력한 체질 개선에 착수, 차량용 전자장비 전문 기업으로 탈바꿈시켰다. 변영삼 대표 역시 2016년 340억 원에 불과했던 영업이익을 지난해 4000억 원 규모로 끌어올렸다. 금융권 출신의 최진환 대표는 ADT캡스를 이끌며 보안 서비스 소비자들의 불만율을 크게 낮추는 등의 성과를 냈다.
황태호 기자 tae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