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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순례길’ 지키는 유일한 한국인 신부…“목표 세우지 말고 길에 맡겨라”

입력 | 2019-01-02 16:07:00



《사랑과 자비는 종교인의 으뜸 덕목이다. 종교인을 둘러싼 여러 논란에도 헌신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신년기획으로 해외를 중심으로 사랑과 자비의 길을 걸어가는 종교인들을 4회에 걸쳐 만난다.》

인영균 신부

스페인 레온 주 ‘라바날 델 카미노’ 베네딕도 수도원의 인영균 신부(53). 1000년 세월 동안 무수한 사람들이 신앙과 삶의 구원을 위해 걸었던 산티아고 순례 길을 지키고 있는 유일한 한국인 신부다. 이 순례 길은 예수의 열 두 제자 중 하나였던 야고보(스페인 식 이름은 산티아고)의 무덤이 있는 스페인 북서쪽 도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향한다. 특히 프랑스 남부 생장에서 시작해 피레네 산맥을 넘어 목적지에 이르는 800여㎞는 프랑스 길로 불린다. 인 신부가 활동하는 수도원은 목적지의 3분의2 지점에 있다. 한국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는 그를 최근 서울 중구 분도회관에서 만났다.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본원장과 서울 장충동 분원장 등을 지낸 그는 2016년 이곳으로 파견됐다.

―프랑스 길은 다른 코스와 달리 영적인 길로 불린다.

“9세기 야고보 성인의 유해가 기적적으로 발견된 뒤 유럽 전역에서 순례자들이 영적 힘에 끌려 걸어오기 시작했다. 가장 오래된 이 길에서는 과거 순례자들의 신앙은 물론 고통과 땀, 역사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그래서 하느님을 믿든 안 믿든, 많은 순례자들이 놀라운 것들을 체험한다.”

―수도원은 어떤 역할을 하나.

“현재 스페인과 독일 신부, 베네수엘라 출신 수사가 함께 일하고 있다. 5~10월까지 순례자의 집을 운영하며 숙식을 제공하는데, 이용자는 여건에 따라 비용을 기부하면 된다. 기도와 함께 원하면 상담을 해주고 있다. 단, 숙박 조건은 이틀 이상 묶는 것이다.”

―왜 이틀 이상인가.

“우리 수도원은 전체 여정에서 3분의2 지점에 있다. 순례를 처음 시작할 때는 걷는 게 힘들지만 나중에는 관성화해 몸이 계속 앞으로 가자고 한다. 그럴 때 휴식을 취하며 자신의 경험과 고민을 대화로 나누면서 ‘큰 쉼표’를 찍어야 한다.”


―순례의 놀라운 체험을 말하는 이들이 많다. 어떤 이유인가.

“순례자는 자신의 집 현관문을 나서는 순간 신분이 순례자로 바뀐다. 국적과 종교, 나이와 성별, 직업과 빈부는 관계없다. 순례 길에서는 신앙적 체험 뿐 아니라 여러 놀라움을 만날 수 있다. 언어가 달라도 대화가 이뤄진다. 절뚝거리면 누군가 치료를 도와주고, 길을 잘못 들어서면 제대로 된 곳까지 차에 태워준다. 길에서 만나는 이유 없는 친절은 순례자이기 때문에 이뤄지는 것이다.”

―한국인 순례자는 자주 만나나.

“거의 매일 만났다. 절반은 가톨릭 신자이지만, 나머지는 개신교와 불교 신자, 신앙이 없는 분들로 다양했다.”

―순례자를 위해 조언을 해 준다면.

“대부분 너무 바쁘다. 순례는 무작정 걷거나 목표 달성을 위한 게 아니다. 아직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선물’로 발견하기 위한 것이다. 길에 맡기면 된다.”

―특히 한국인 순례자들이 계획적일 것 같다.

“(웃음) 오랜 습관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룹으로 오지 말라, 목표 세우지 말라, 만남과 헤어짐에 두려워하지 말라, 멈춰라, 이런 조언들을 자주 한다. 그룹으로 오거나 목표를 세우면 얽매이고 무리하기 쉽다.”

―모든 사람을 위한 조언을 해 달라.

“이상하게 들릴 수 있지만 순례, 카미노(길)는 가짜다. 순례를 마친 뒤 당신이 출발했던 삶의 자리로 돌아갔을 때 당신의 진정한 카미노가 시작될 것이다. 비 신앙인이라면 삶의 근본적 이유, 인간답게 사는 길이 무엇인가를 찾는 것 아닐까? 내가 내 힘으로만 사는 게 아니었다는 걸 느끼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신앙인이라면 예수 그리스도에 한발 한발 더 다가서는 길을 찾는 기회가 될 것이다. 그러다 지치면 다시 카미노를 찾으면 된다.”

김갑식 문화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