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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 잃은 아이들의 보금자리… 유학꿈도 도와”

입력 | 2018-11-21 03:00:00

12월 설립 100주년 맞는 구세군 서울후생원 김호규 원장
영유아 31명 포함 원생 67명 생활… 자원봉사-후원 4000명이 버팀목
올해 캐나다 대학 입학한 최다현군, ‘수석졸업 할래요’ 편지 보내와 뿌듯




올해 초 서울 서대문구 독립문로에 있는 구세군서울후생원에 반가운 소식이 도착했다. 후생원 출신으로 올해 2월 캐나다 토론토 조지브라운대 조리학과에 입학한 최다현 씨(21)의 편지였다. 그는 ‘한국에 다녀온 지 두 달 정도인데 왜 이렇게 그리운지. 모두 저를 위해 기도하며 힘써 도와주신 것에 감사드리며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다’며 ‘학비가 비싼 만큼 가능하면 수석으로 졸업하고 싶다’고 썼다.

그는 고교 3학년이던 2015년 영국에서 열린 구세군 150주년 국제대회에 후생원 풍물팀으로 참가하면서 외국에 나가 요리 공부를 하고 싶다는 소망을 품게 됐다. 이후 구세군과 캐나다 교포의 도움으로 어학연수를 한 뒤 꿈을 이뤘다.

최근 만난 서울후생원장 김호규 사관(51·사진)은 최 씨의 유학은 아직은 ‘특별한 사건’이라고 했다. “일반 가정에서는 대학에 가지 않으려면 용기가 필요하지만, 후생원 출신 학생들은 학업과 함께 자립도 해야 하기 때문에 더 큰 용기가 필요합니다.”

다음 달 30일 설립 100주년을 맞는 구세군후생원은 방임과 학대, 가정해체 등으로 가정 내에서 양육이 어려운 아이들을 위한 아동생활시설이다. 1918년 12월 30일 서울에서 처음 문을 연 뒤 대구와 전북 군산, 대전에도 생겼다. 국내에서는 5번째, 개신교에서는 첫 번째 아동생활시설이었다. 이후 후생원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국내 아동복지의 산증인이 됐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한 뒤 브라스밴드 대원 18명이 납북되는 아픔을 겪었다. 전쟁 중에도 부산과 제주로 옮겨가면서 아이들을 양육했다.

1970, 80년대에는 100여 명이 후생원에 있었지만 지금은 67명이 생활하고 있다. 김 사관은 “과거에는 전쟁과 방임, 학대 때문에 시설로 오는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요즘에는 베이비박스에 남겨지는 아이들이 많다”며 “영·유아 31명 가운데 23명이 베이비박스에 남겨진 케이스”라고 했다. 서울후생원은 설립 100주년을 앞두고 ‘구세군서울후생원 100년사’를 발간했고 최근까지 세 차례 기념음악회를 개최했다. 사회복지사와 간호사, 상담심리사 등 36명이 이곳에서 일하고 있다. 연중 자원봉사자 3500여 명과 후원자 500여 명이 후생원 운영의 큰 버팀목이다.

김 사관은 “이곳에 있는 아이들은 받는 데 익숙하기 때문에 나누고 감사하는 마음을 키워주기 위해 노력한다”며 “다현이처럼 꿈을 이룬 아이들의 편지를 자주 받고 싶다”고 했다.
 
김갑식 문화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