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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켈 “국가적 자만이 세계대전 불러” 트럼프 겨냥 뼈있는 반성

입력 | 2018-11-13 03:00:00

트럼프 성토장 된 파리평화포럼
“타협 거부, 심각한 결과 초래” 경고
마크롱 “평화와 무질서 기로에 서”… 트뤼도 “언론공격은 민주주의 위협”
트럼프 불참… 미군묘지 홀로 찾아




외톨이 된 트럼프 11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파리 평화포럼’에 참석한 정상들이 맞은편 상단 전광판 화면을 쳐다보고 있다. 앞줄 왼쪽부터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 제1차 세계대전 종전 100주년을 기념해 창설된 이 포럼에서 정상들은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를 비판하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미국 우선주의’를 에둘러 성토했다. 비슷한 시간 포럼에 불참한 트럼프 대통령은 우산을 들고 파리 근교 쉬렌 미군 참전용사 묘지를 방문했다(오른쪽 사진). 파리·쉬렌=AP 뉴시스

11일 오후 프랑스 파리 19구 빌레트 대박람회장에 세계 정상들이 속속 입장하기 시작했다. 앞서 오전 파리 개선문에서 열린 제1차 세계대전 종전 100주년 기념행사와 대통령궁인 엘리제궁 오찬에 참석했던 독일 캐나다 러시아 터키 등의 각국 정상이 대박람회장에서 열린 파리평화포럼에 참석했다. 이 포럼은 1차 세계대전 종전 100주년을 기념해 전쟁의 아픔을 되새기고 영구적인 평화 정착을 위해 머리를 맞대 보자는 취지에서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올해 창설한 국제회의다.

마크롱 대통령 옆에는 1차 세계대전 침략국이었던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앉았다. 미국과 동맹인 캐나다의 쥐스탱 트뤼도 총리 옆 자리엔 냉전시대 서방의 적이었던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있었다. 세계를 향해 평화의 메시지를 던지는 자리에 지난 100년간 ‘세계 경찰’의 역할을 자처해 왔던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보이지 않았다.

이날 포럼 참석자 중 누구도 트럼프 대통령의 이름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하지만 국가주의, 민족주의, 극단주의, 포퓰리즘 등 이들이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요소로 본 것들은 모두 트럼프 대통령을 염두에 둔 발언으로 풀이된다.

원형 무대에 올라 마이크를 잡은 마크롱 대통령은 “지금 우리는 지속가능한 평화의 시대로 남을지, 아니면 무질서로 가는 통합의 마지막 순간에 있을지 기로에 서 있다”며 “평화를 위해 지속적으로 싸워 온 선조들을 위해 구체적인 행동을 할 때”라고 말했다. 이어 개막 연설자로 나선 메르켈 총리는 1,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전범 국가의 반성으로 연설을 시작했다. 메르켈 총리는 “국가적인 자만심과 군사적인 거만함이 두 차례의 세계 전쟁을 일으켜 무분별한 유혈 사태로 이끌었다”며 “국가 간 커뮤니케이션 부족과 타협에 대한 거부감은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군사·경제적으로 세계를 압박하고 있는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 우선주의’를 겨냥한 것이다.

메르켈 총리는 국제기구와 다자회의의 비효율성을 지적하는 트럼프 대통령을 에둘러 비판했다. 메르켈 총리는 “지금 도대체 유엔이 하는 일이 뭐냐고 묻지만 유엔을 파괴하면 다시 만드는 건 너무나 어려운 일”이라며 “오늘 우리가 즐기는 평화가 당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1차 대전은 고립이 인간을 어디까지 파괴할 수 있는지 보여줬다. 지금 닥친 도전은 한 나라가 혼자 해결할 수 없다”고 호소했다.

1차 대전 종전 기념행사와 이날 포럼에서 또다시 과거를 반성한 메르켈 총리는 자국의 극우정당으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했다. 알렉산더 가울란트 ‘독일을 위한 대안’ 대표는 “메르켈 총리는 1차 대전 승자들의 이벤트인 파리 행사에 참석하지 말았어야 했다. 우리 스스로 승자들의 입맛에 맞는 역사 속으로 들어가서는 안 된다”며 메르켈 총리를 공격했다.

마크롱 대통령은 이날 동시다발적으로 열린 여러 세션 가운데 국경없는기자회가 주최한 ‘위험에 빠진 자유’ 세션 등 두 곳에 참가해 글로벌 자유주의와 국제 협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세션에 함께 참가한 트뤼도 총리는 “미디어를 향한 공격은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이라며 “시민들이 권력에 대해 합리적인 분석을 할 수 없다면 그때부터 민주주의 근간이 침식당하고 냉소가 시작된다”고 말했다. 트뤼도 총리의 이 같은 발언에 대해 캐나다 언론들은 주류 언론을 ‘가짜 뉴스’라고 공격하는 트럼프 대통령을 겨냥한 것이라고 전했다.

스테판 뢰벤 스웨덴 총리와 무사 파키 아프리카연합 집행위원장은 기후 변화 문제에 전 세계의 협력이 시급하다고 호소했다. 이 역시 지난해 파리 기후변화협약 탈퇴를 선언한 트럼프 대통령을 겨냥한 발언이다.

포럼이 열리는 동안 트럼프 대통령은 파리 근교에 있는 쉬렌 미군묘지를 찾았다. 트럼프 대통령은 전날 비가 온다는 이유로 미군 묘지를 방문하지 않았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트럼프 대통령은 파리 방문 기간 내내 다른 정상들과 함께 이동하지 않고 혼자 다니면서 많은 시간을 숙소인 주프랑스 미국대사관저에서 보냈다. AP통신은 “파리에서의 트럼프 대통령에게 ‘아메리카 퍼스트(America First·미국 우선주의)’는 대체로 ‘아메리카 얼론(America alone·미국 외톨이)’을 의미했다”고 꼬집었다.


:: 파리평화포럼 ::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프랑스판 다보스포럼을 꿈꾸며 올해 창설한 국제회의. 사흘 동안 120개 프로젝트에 대해 정부, 학계, 기업, 언론, 시민 단체가 모두 참석해 공개 토론 형태로 진행된다. 올해 60개국 이상이 참가한다. 포럼의 큰 주제는 평화와 안보, 환경, 개발, 포용 경제, 새로운 기술 등 5개다.

파리=동정민 특파원 ditt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