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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학력-기혼 여성도 “NO” 못외쳤다

입력 | 2018-09-03 03:00:00

성폭력 피해자들 학력과 무관




“명문대 나온 당신은 머리 좋은 조사관인데, 날카롭게 항의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상사로부터 8개월간 성추행을 당한 P 씨(36·여)가 재판 과정에서 판사에게 들은 말이다. “머리도 좋은 편일 텐데 성추행 당했을 때 기록이나 메모를 안 남겼느냐” “처음부터 문제제기를 않고 몇 달 동안 왜 참은 것이냐”는 질문도 나왔다. 분명 ‘질문’이었지만 그에겐 ‘질책’처럼 들렸다.

P 씨는 고학력 여성이다. 명문대를 졸업한 뒤 7급 공무원으로 임용됐다. 2014년 2월부터 8개월간 직속 상사의 괴롭힘이 이어졌다. 그러나 P 씨는 항의하지 못했다. 다른 이유는 없다. 가해자는 직장 내에서 지위 등이 자신보다 우월한 상사였기 때문이다. P 씨는 “가해자는 나보다 더 학력이 높고 사회적 지위가 높았다. 그도 상식이 있는 사람이니 ‘이번이 마지막이겠지’ 하며 8개월간 참은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달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53)의 1심 무죄 판결 이후 고학력자의 성적 자기결정권이 논란이 되고 있다. 재판부는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을 폭넓게 인정하면 피해자의 성적 자기결정권이 침해될 수 있다고 명시했다. 특히 안 전 지사의 전 수행비서 김지은 씨(33)처럼 학력이 높고 장애가 없는 성인이 위력에 굴복해 성폭력 피해를 반복적으로 당했다는 건 납득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하지만 재판부의 논리는 성폭력 피해자의 상담 사례나 통계와는 큰 차이가 있다. 피해자의 나이, 학력, 결혼 여부를 불문하고 성폭력은 무작위로 발생했다. 여성가족부가 2016년 실시한 성폭력 실태조사를 보면 19세 이상 성인 피해자 중 대학 및 대학원을 졸업한 고학력자가 40.3%였다. 미혼(23.6%) 피해자보다 기혼(67.3%)이 많았다. 장애가 있는 사례는 1.3%로 대부분 장애가 없었다. 학력이나 지위가 낮은 약자(弱者)가 성범죄에 취약할 거라는 사회적 통념과는 정반대의 결과였다.

이웅혁 건국대 교수(경찰학)는 “고학력자가 왜 저항하지 못했느냐고 묻는 건 상하 관계에서 발생하는 권력형 성범죄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피해자들은 “저항하라” “증거를 남겨라” 같은 조언들은 실제 상황에선 무력하게 느껴졌다고 입을 모았다. 4년제 대학을 졸업하고 출판계에 종사하는 K 씨(52·여) 역시 4년 전 술자리에서 선배로부터 성추행을 당했을 때 아무 저항을 할 수 없었다고 고백했다. K 씨는 “불쾌감과 모욕감이 밀려오지만 당시 나는 당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게 더욱 끔찍했다. 성추행을 하는 선배의 손을 아무도 보지 못하길 속으로 기도했다”고 했다.

남성 역시 직장 내 서열에서 발생하는 위력에 저항하기는 쉽지 않다. 대기업 3년 차 사원인 Q 씨(28)는 지난해 7월 15년 먼저 입사한 여자 선배에게 성추행을 당했다. 자정 넘어 업무가 끝나자 선배는 Q 씨에게 “단둘이 노래방에 가자”고 제안했다. 선배는 웃옷을 벗고 Q 씨를 끌어안는 등 2시간 넘게 추행을 계속했다. Q 씨는 “(피해 상황에서) ‘성폭력을 당하면 항의하라’는 정언 따윈 생각나지도 않았다. 피해 다니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라고 말했다.

한 성폭력피해 상담 전문가는 “고학력자에게 성범죄를 저지르는 가해자는 상대적으로 학력과 사회적 지위가 더 높은 강자(强者)다. 수직적인 조직 분위기 속에서 강자가 휘두르는 위력에 굴복하지 않을 피해자는 많지 않다”고 말했다.

이지훈 easyhoon@donga.com·김은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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