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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향기]다시 꿈꾸기 위해 우리는 포구로 간다

입력 | 2018-07-28 03:00:00

◇당신을 사랑할 수 있어 참 좋았다:곽재구의 신(新) 포구기행/곽재구 지음·최수연 찍음/368쪽·1만6800원·해냄




책 310쪽에 실린 최수연 사진작가의 작품. 경남 거제시에 있는 ‘바람의 언덕’에서 ‘도장포’ 풍경을 담았다고 한다. 시인은 이곳을 그린 글에 ‘인간의 시간들 하늘의 별자리처럼 빛날 때’란 제목을 달았다. “좋은 길을 간다는 것, 아름다운 삶을 꿈꾼다는 것. 소소한 시간의 바다에 자신만의 작은 나뭇잎 배 하나를 띄울 수 있다면 그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세상은 정직하고 아름답지 않겠는가”라며. 감히 무슨 말을 덧붙이겠는가. 해냄 제공

한참, 책꽂이를 서성거렸다.

몇 번의 이사. 여러 책을 떠나보냈다. 그 와중에 남아준 이들. 애정이라 부르며 집착으로 붙잡았다. 귀퉁이에서 곰삭은 먼지의 때깔. 겨우 찾아든 옛 친구는 무표정했다. 그래도, ‘곽재구의 포구기행’(열림원)은 다시 곁을 내줬다.

16년. 닳아빠진 세월은 찰나의 영겁. 2002년 우린 어디서 무얼 했던가. 몇 줄로 채워질 추억에 섞이지 않는 마음. 하지만 신기하게도, 마법처럼. 책을 펼치면 몽실몽실 빚어지는 흑백사진. 조심스레 양손에 담아 ‘곽재구의 신(新) 포구기행’을 맞아들였다.

시인은 왜 다시 포구로 돌아온 걸까. 전화를 걸어 우문(愚問)을 던지려다 꾹 눌렀다. 답은 책에서 구해야지. 작가는 글로 전했건만. 지름길만 찾는 심보 같으니. 길이 어긋나도, 혹은 가로막혀도. 목적지는 각자의 몫이다.

“생의 어느 신 하나는 내게 이 포구마을의 불빛들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이 시간들 속에서 나는 위로받고, 갈망뿐인 나의 시가 더 좋은 인간의 세상으로 나아가는 작은 물살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꿈을 꾸게 됩니다. … 하늘과 땅이 함께 아름다운 색 도화지가 됩니다. 다시 새로운 생의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없이 평범하고 누추하면서도 꿈이 있는 새로운 시를 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를 따라 떠난 두 번째 여행은 옹골지다. 뭉툭한 현실에서 길어 올린 시어(詩語)가 메마른 목젖을 두들긴다. 고맙고 미안하다. 주머니 털어 시집 한 권 샀던 게 언제였던가. 남 탓, 세상 탓하며 바스러진 기억. 부끄러워 성마르다 짐짓 외면한 채 잊어버린. 매몰찼던 우리네를 포구는 나지막이 불러 세웠다. 그래도 시인은, 시를 쓰노라고. 당신과 나의 노래를.

물론 전작과 신작은 ‘다르다’. 문장은 간명한데도 깊어졌다. 선창을 때리던 파도는 잦아들었건만, 발목을 적시는 물살은 더 찐득해졌다. 외로운 절창이 여백마저 채우던 지난날. 오늘은 마주 잡은 합창이 굳이 공간을 비워낸다. 후회건 희망이건 상념이건 다짐이건. 퍼 담든지 게워 내든지 알아서 할밖에.

“망상 해변으로 가는 동안 망상이란 이름의 의미가 궁금해졌다. 헛된 꿈(妄想)이라면 충격일 것이다. 이정표에서 망상(望祥)을 보는 순간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삶은 여전히 꿈꾸는 자의 것이며 쓸쓸함 속에서 아름다움을 기약하는 이의 것이 아니겠는가. 동해의 파도소리가 손에 잡힐 듯 들려왔다.”

시인은 여전히, 때로는 아프다. 팽목항에서 삼킨 울음. 학동에서 짊어진 서글픔. 그래도 그는 다독인다. 서럽다 읊조린들 붙잡지 못하는 이별. 잊지 말되 걸음을 옮기자고. 시계가 만든 인연의 씨줄날줄을 고르게 펴가며. 당신이 찾아와서, 만나서, 알아봐서 참 좋았단 기척을 보낸다.

어쩌면 뒷목을 움켜쥐던 열정은 다시 오지 않겠지. 처연했던 생채기도 이미 포구 멀리 휩쓸렸을 테니. 그런들 바다가 아닐까. 시가 아닐까. 우리가 아닐까. 만선의 뿌듯함은 지워졌을지언정. 노를 젓는 삶은, 지난해도 기대가 영근다. 시인이 발걸음마다 반겼던 붉은 우체통처럼. “우체통은 종일 그 자리에 서있을 것이고 노을은 하루에 한 번 꼭꼭 그 우체통을 쓰다듬고 지나갈 것”이기에. 우린 또, 길 떠날 채비를 한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