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범석 도쿄 특파원
이곳에는 ‘가마쿠라 고교 앞’이라는 뜻의 가마쿠라고코마에(鎌倉高校前)역도 있다. 복선도 아닌 단선인 데다가 출입구는 달랑 한 곳, 역무원도 없는 초라한 간이역이다. 하지만 이 역의 이용 승객은 2016년 기준 73만 명을 넘었다. 간이역치고는 이용률이 높은 편이다. 주말에는 발 디딜 틈이 없을 때도 있다.
이 역에 내리면 희한한 광경을 볼 수 있다. 대부분의 승객이 역 바로 앞 건널목에서 열차가 지나갈 때마다 사진을 찍는다.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1990년대 초 인기를 얻었던 일본 애니메이션 ‘슬램덩크’의 팬이라는 것이다. 농구를 소재로 10대들의 도전과 열정을 그려 낸 이 작품은 당시 한국에서도 ‘농구대잔치’ 붐과 맞물려 인기를 얻었다. 이들이 사진을 찍는 곳은 주인공 강백호가 건널목에서 여주인공을 기다린 장소로 유명하다. 건널목 하나뿐인 이곳에서 한국어, 중국어, 영어 등 다국적 언어가 쉼 없이 들린다. 가끔 ‘히잡’을 쓴 아랍인도 보인다. 지구 반대편에 살고 있는 그가 ‘강백호 건널목’까지 오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문화의 힘이 아니고서는 설명하기 어렵다.
세계에서 인기를 얻었던 일본 문화는 현재 뜻밖의 길에 들어섰다. 최근 4인조 록 밴드 ‘래드윔프스’의 신곡 ‘히노마루(일장기)’ 가사에는 ‘두근거리는 피, 자랑스럽게/이 몸에 흐르는 것은 고귀한 이 제국과 영혼/자, 가자! 해가 뜨는 나라의 일왕 곁으로’ 같은 군국주의 군가를 연상케 하는 내용으로 채워졌다. 포크 듀오 ‘유즈’도 가사에 ‘야스쿠니신사’ 같은 민감한 내용을 담은 노래를 발표해 논란을 빚었다.
최근 한국의 오디션 프로그램에 참가한 일본의 톱 아이돌 그룹 ‘AKB48’도 3년 전 콘서트에서 일본의 미국 하와이 진주만 공습 장면을 배경 사진으로 사용한 사실이 알려졌다. 한 멤버는 오디션 프로그램 출연 직전에 일본 자위대 잡지의 표지 모델로 활동하는 등 우익 논란에서 자유롭지 않다. 항공 자위대를 전면에 내세운 드라마,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영화, 일본군 군함이 소녀로 의인화돼 전쟁을 벌이는 게임 등 우경화 현상이 다양한 분야에서 나타나고 있다.
25일 니혼게이자이신문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를 지지하는 18∼29세의 비율은 45%로 나타났다. 몇 년 전부터 아베 총리의 지지율이 가장 높은 연령대가 10, 20대다. 이런 ‘젊은 보수’의 입맛에 맞는 문화 콘텐츠가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 대신 탄탄한 구성력이나 기발한 아이디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 정서 등 예전 일본 문화 콘텐츠의 강점들은 옅어지고 있다.
제2, 제3의 ‘강백호 건널목’이 나올 확률이 점점 더 낮아지고 있다.
김범석 도쿄 특파원 bsis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