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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부형권]‘대통령 중임제’로 넘어가기 전에

입력 | 2018-03-05 03:00:00


부형권 국제부장

서울 여의도 정가(政街)에서는 대한민국 국회의원을 ‘선거만 없으면 최고의 직업’으로 묘사한다. 원숭이는 나무에서 떨어져도 원숭이지만, 국회의원은 선거에서 떨어지면 사람도 아니라는 표현과 묘하게 연결된다. 진땀 나고 피 말리는 선거만 통과하면 임기 4년간 떵떵거리며 지낼 수 있다. 미국 특파원 시절 만난 미국 하원의원들은 한국 국회의원에 비하면 열악한 삶을 사는 것처럼 느껴졌다. 일단 임기가 2년이다. 뉴욕주의 한 하원의원은 “당선된 날 딱 하루만 기쁘다”고 했다. 그 다음 날부터 의정활동과 정치자금 모금 활동으로 눈코 틀 새가 없단다. 임기 2년 전체가 선거운동이란 얘기다.

상당수 하원의원들은 상원의원을 꿈꾼다. 50개 주에서 각 2명씩 선출되는 상원의원의 임기는 6년. 435명의 하원의원이 지역 정치인이라면, 100명의 상원의원은 전국적 스타다. 상원의원에서 바로 백악관으로 입성한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35대),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44대)이 대표적이다. 잠재적 대통령 후보군엔 상원의원 100명과 함께, 50개 주의 주지사(50명)도 포함된다. 지미 카터(39대), 로널드 레이건(40대), 빌 클린턴(42대), 조지 W 부시(43대) 전 대통령 등이 주지사 출신이다.


2016년 미국 대선을 현지에서 지켜보면서 ‘미국은 나라 크기만큼 대통령(후보)감도 풍부하다’고 느꼈다. 언제 대선판에 뛰어들어도 손색없는 상원의원과 주지사만 150명이 있다. 선출직이나 공직 경험이 전혀 없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45대)의 당선으로 대통령 후보군은 더 확장되게 생겼다. ‘미국에서 가장 성공한 흑인 여성’이란 평가를 받는 방송인 오프라 윈프리(63)도 최근 인터뷰에서 대통령 출마를 시사했다.

문재인 정부의 국민헌법자문특별위원회는 13일 문 대통령에게 개헌 자문안을 보고하고, 문 대통령은 20일경 대통령 개헌안을 발의할 예정이라고 한다. 정해구 위원장은 본보 인터뷰에서 “권력구조로는 문 대통령이 (대선 기간) 말한 대통령 4년 중임제를 중점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런지 위원회 홈페이지 설문조사에서도 4년 중임제가 80% 이상의 지지를 얻고 있다. 위원회는 4년 중임제의 대표적 나라인 미국의 대통령제를 많이 참고했을 것 같다.

인구 수 기준으로 한국(5484만 명·미 중앙정보국 자료)은 미국(3억2663만 명)의 6분의 1쯤 된다. 그 배율을 그대로 단순 적용한다면 잠재적 대선후보도 미국(약 150명)의 6분의1(25명) 정도는 돼야 한다. 그런데 대선 때마다 인물난에 시달리고, 재수 삼수하는 경우도 흔하다. 18대, 19대 대선에선 주요 정당 후보가 모두 특정 지역 출신이었다.

‘이단아’로 불리던 트럼프는 백악관에 들어가 앉으니 점점 더 ‘미 합중국 대통령’ 느낌이 난다. 그런데 한국의 대통령은 아무리 훌륭한 분이라도 청와대만 들어가면 나올 때 ‘실패한 대통령’ 범주에서 벗어나질 못한다. 대통령을 제외한 모든 국민은 “1명(대통령)만 잘하면 나라가 잘된다”고 하고, 정작 전직 대통령들은 진보-보수 가리지 않고 “내가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았다”고 한탄한다.
 
이쯤 되면 대통령들의 개인적 문제로 봐야 하나, 대통령제의 구조적 문제로 봐야 하나. 대통령 중임제 개헌안을 확정하기 전에 한번쯤 진지하게 ‘대통령 없는 대한민국’의 모습을 그려보면 안 될까. 참고로 이승만 독재 정권을 4·19혁명으로 무너뜨린 뒤, 5·16군사쿠데타 전까지의 대한민국 권력구조는 지금 같은 대통령중심제가 아니었다.
 
부형권 국제부장 bookum90@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