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새로운 길 즐긴 개척자들 “우린 메달 받을 자격있다”

입력 | 2018-02-26 03:00:00

[평창올림픽 폐막]봅슬레이 4인승-스노보드 평행대회전 ‘불모지에 피어난 은메달’




봅슬레이팀 환호 한국 봅슬레이 남자 4인승 대표팀 선수들(왼쪽부터 원윤종, 김동현, 전정린, 서영우)이 25일 평창 슬라이딩센터에서 봅슬레이 남자 4인승 4차 주행을 마치고 공동 1위로 올라선 것을 확인한 뒤 환호하고 있다. 한국은 바로 뒤에 주행한 독일에 밀렸지만 사상 첫 은메달이란 값진 성적을 냈다. 평창=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지난 8년 세월이 몇 초 동안 스쳐가는 듯했다. 뜨거운 땡볕이 내리쬐는 아스팔트 도로에서 바퀴 달린 썰매를 타며 메달의 꿈을 키워온 시절. “안 될 거다”라는 주변의 차가운 시선에 오기로 맞섰던 나날들. 보란 듯이 주먹 쥔 두 손을 하늘을 향해 뻗었다. 25일 낮 12시 10분경 강원 평창 슬라이딩센터. 막 결승선을 통과한 파일럿 원윤종(33)은 세상을 향해 당차게 선언했다. “우린 충분히 메달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평창 올림픽 폐막을 앞두고 이틀 연속 한국 겨울올림픽의 새 역사가 쓰였다. 원윤종이 이끄는 한국 봅슬레이 4인승 대표팀(서영우 전정린 김동현)은 이날 아시아 첫 메달을 은빛으로 장식했다. 전날 열린 스노보드 남자 평행대회전에서는 이상호(23)가 은메달을 따내며 한국 설상에 새 이정표를 세웠다.

봅슬레이 4인승에서 한국 대표팀 ‘원팀’(파일럿 이름)은 최종 합계 3분16초38을 기록해 독일의 니코 발터 조와 ‘100분의 1초’까지 똑같아 공동 은메달을 수상했다. 독일의 프란체스코 프리드리히 조는 이보다 0.53초 앞서 정상에 올랐다.

체육교사를 꿈꾸다 2010년 봅슬레이에 입문한 원윤종은 당시 처음 나간 아메리칸컵에서 썰매가 뒤집어졌을 때 타국 선수들로부터 “왜 여기 와서 남의 주행을 방해하느냐”는 멸시를 받기도 했다. 원윤종의 단짝 서영우(27)는 봅슬레이 입문 초창기에 하루 8끼를 먹으며 무모할 정도로 살을 찌웠다. 2인승 출전을 포기하고 4인승에 승부를 걸었던 김동현(31)과 전정린(29)도 감개무량해했다.

하루 앞서 이상호는 한국이 겨울올림픽에 참가한 지 58년 만에 최초로 설상 종목 메달을 일궈냈다. 그 시작은 고향인 강원 정선의 고랭지 배추밭이었다. 초등학교 1학년 당시 이상호는 아버지 이차원 씨의 손을 잡고 배추밭을 개조해 만든 눈썰매장을 찾아 스노보드를 배웠다. 그래서 생긴 별명이 ‘배추보이’다. 배추밭에서 꿈을 키운 이상호는 시상식을 마친 뒤 올림픽 기간 식사를 책임진 주방장이 직접 배추로 만들어준 꽃다발을 받고는 활짝 웃었다.

평창에서 새롭게 태어난 영웅들은 메달 색깔에 연연하지 않았다. 과거 올림픽에서 한국 선수들은 은메달을 목에 걸면 마치 죄인이라도 된 듯 고개를 숙였다. “응원해준 국민 여러분께 죄송하다”는 게 단골 레퍼토리였다.

하지만 평창에서는 달랐다. 후회 없이 도전한 만큼 시상대에 오른 것 자체를 무한한 영광으로 여겼다. 국가관이 약해진 게 아니라 선수들도 무엇보다 행복의 가치를 중시하는 분위기가 됐다. 1등만 기억하는 비정한 세상에 대한 일반 젊은이들의 반감은 운동선수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작용했다.

한국은 평창 올림픽에서 역대 최다인 17개의 메달을 따냈다. 과거 스피드스케이팅과 쇼트트랙 메달 쏠림 현상에서 벗어나 썰매와 설상 종목, 컬링에서도 값진 메달을 추가했다. 최준서 한양대 교수(스포츠산업 전공)는 “겨울스포츠는 선진국의 전유물로 불린다. 이번에 한국 스포츠의 새로운 지평이 열렸다는 게 큰 수확이다. 선배 세대와 다른 젊은 선수들이 그 주역”이라고 평가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을 통한 적극적인 소통과 자신감 표출도 과거와는 달라진 점이다. 이상호는 경기 전 두 엄지에 네일아트로 태극기와 스노보더를 그린 사진 하나를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더 이상 한국이 설상의 변방국이 아니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올림픽에서 좋은 성적을 내고 이 손톱을 보여주며 ‘나 대한민국 선수야’라는 것을 자랑하려 했습니다.”

‘금메달의 신화’를 쓴 윤성빈(24·강원도청)도 “스켈레톤을 시작했을 때부터 유럽 톱 랭커를 못 넘을 산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다”고 말해 왔다.

신세대 선수들은 국민소득 3만 달러 시대를 맞아 예전과 비교할 수 없는 체계적인 지원 속에 결실을 볼 수 있었다. 이번 올림픽에서 봅슬레이스켈레톤 국가대표팀엔 스태프를 포함해 19명의 코치진이 포진했다. 4년 전 소치 올림픽엔 이용 감독을 포함해 두 명의 코치가 전부였다. 스노보드 알파인 대표팀도 외국인 기술전담, 왁스장비 전문 코치는 물론이고 전담 체력 트레이너, 마사지사까지 5명의 코칭스태프가 가세했다.

원윤종은 경기를 뛴 건 4명이었지만 메달을 따낸 건 감독과 코치 등 대표팀 전원이었다고 강조한다. “개개인의 기량은 유럽, 북미 선수들을 앞서지 못합니다. 하지만 네 명이 뭉치는 힘은 우리가 강해요. 선수 네 명뿐 아니라 코칭스태프, 연맹, 후원단체 등 체계적으로 우리를 지원해준 많은 분이 함께 만든 은메달이라고 생각합니다.”

평창=김재형 monami@donga.com·임보미 기자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