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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윤완준]누가 소화전에 수도꼭지를 설치했나

입력 | 2018-01-09 03:00:00


윤완준 베이징 특파원

4일 중국 관영 중국중앙(CC)TV 홈페이지에 올라온 한 영상에 처음엔 실소를 금치 못했다. 중국 산둥(山東)성 지난(濟南)시 방송사의 ‘뉴스종합’ 프로그램이었다. 지난시 한 지역의 도로변 소화전에 누군가 수도꼭지를 설치했다. 소화전에 연결된 기다란 관 끝에 매달린 수도꼭지를 틀자 물이 콸콸 나온다. 생사를 다투는 화재에 대비해 설치한 소화전의 물을 슬쩍 훔쳐간다니. 도대체 누가 저지른 짓일까.

프로그램 사회자는 수도꼭지 설치가 ‘합법인가, 불법인가’를 제기했다. 한 주민은 “소방 규정에 분명히 금지돼 있을 텐데”라고 말한다. 다른 주민은 소화전 앞뒤에 주차된 차들을 보며 “세차에 쓰려 한 것 아닌가”라며 고개를 갸우뚱한다. 또 다른 주민은 “개인이 설치한 게 아닐 거야. 감히 누가 소화전 물을 도둑질해”라며 혀를 찬다. 다들 누가 물을 쓰는지는 “못 봤다”고 한다.

한국에서 제천 참사를 계기로 소방서, 소화전 앞 불법 주차에 대한 문제 제기가 잇따라 터져 나오던 때였다. 기자가 중국엔 소방서 앞 불법 주차 문제가 없는지 알아본 다음 날이기도 했다. 중국 매체에 따르면 지난해 1월 충칭(重慶)시 한 지역 소방서 입구에 차량이 밤새 세워져 있자 소방서 측이 경찰을 불렀다. 불려온 차 주인은 소방서인 줄 몰랐다며 차 빼기를 거부하다가 200위안(약 3만2000원)의 벌금을 물었다. 이 외에도 소방서 앞 불법 주차 관련 소식을 찾기가 어렵지 않았다.


중국 도로에서는 교통신호를 지키지 않는 것이 어떨 때는 정상으로 보일 정도다. 자동차든 사람이든 빨간불일 때 서고 녹색불일 때 건넌다는 상식이 통하지 않는 곳이 상당수다.

사정이 이러니 소화전 수도꼭지 사건도 시민의식이 부족한 한 얌체가 몰래 저지른 일이려니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길 건너 주택 건물의 수압이 약해 3층부터 물이 잘 안 나온다”는 주민의 말로 반전이 시작된다. 이어 지난시 수도회사 관계자의 말이 흘러나온다. “수압이 약해 물이 (3층 이상으로) 안 올라갑니다. 주민들이 물 쓰기 편하도록 우리가 설치한 거예요. 규정에 부합하고 합법입니다. (바로) 우리가 소화전 관리 부서이니까요.”

프로그램 사회자는 불편한 얼굴로 코너를 마친다. “소화전 수도꼭지가 존재하는 시간은 짧을수록 좋습니다.”

다시 중국 도로가 떠올랐다. 보행자 신호 때도 사거리에서 좌회전으로 밀고 들어오는 차량들에 처음엔 섬찟하고 다음엔 분노하는 외국인이 적지 않다. 주위를 잘 살펴보면 좌회전 신호를 따로 둔 사거리가 별로 없다. 대부분 비보호 좌회전인데 보행자 신호일 때 비보호 좌회전을 하도록 한 곳이 적지 않다. 생명을 앗아갈 수도 있는 후진적 행위를 교통 시스템이 부추기고 있는 것이다.

중국은 외교와 경제 면에서 세계적 영향력이 지대한 대국이다. 사회 발전도 상당한 정도에 이르렀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 시민의식을 높이는 사회 시스템은 여전히 국가 위상을 따라가지 못한다. 중국을 대국으로 보지만 선진국으로 부르지 못하는 이유다.

사회 시스템이 시민의식을 제고하지 못하면 시민의 행복은 물론이고 국가의 매력도 떨어진다. 많은 생명을 허무하게 앗아가는 걸 목격하고도 소방서, 소화전 앞에 버젓이 불법 주차하는 한국의 현실을 떠올리면 중국의 소화전 수도꼭지에 쓴웃음만 지을 수 없다.

윤완준 베이징 특파원 zeit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