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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면 호흡 5분만에 나른… “눈꺼풀에 본드” 말에 눈 안떠져

입력 | 2017-11-28 03:00:00

‘15년간 미궁’ 부산 다방 살인사건 해결 한몫한 최면수사 받아보니




15일 경기북부지방경찰청에서 과학수사계 오인선 경위(오른쪽)가 의자에 누워 눈을 감은 본보 김예윤 기자에게 최면을 유도하고 있다. 의정부=조동주 기자 djc@donga.com

“지금 눈꺼풀에 본드를 발라 눈을 뜰 수 없습니다. 눈을 한번 떠 보세요.”

기자는 경기 의정부시 경기북부경찰청 법최면실에 누운 지 얼마 안 돼 과학수사계 오인선 경위(55)의 나긋한 음성을 듣고 온몸이 나른해졌다. 눈을 뜨려고 애썼지만 눈꺼풀이 붙어 있는 느낌에 뜨지 못했다. 오 경위가 “머리를 비우고 호흡에 집중하라”고 말한 지 5분밖에 지나지 않았다. 기자는 부산 여종업원 살인사건이 15년 만에 해결된 데에 최면수사가 결정적으로 기여했다는 소식에 ‘믿을 수 없다’며 최면수사 체험에 나섰다. 하지만 자신 있게 나선 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기자는 결국 눈을 뜨지 못했다.

○ 코흘리개 시절까지 생생

동아일보 취재팀은 15일 오 경위를 찾아 최면수사를 체험해봤다. 오 경위는 경기북부청의 유일한 법최면 담당자다. 최면수사 경력 12년 차 베테랑이다. 최면이라는 ‘신비의 영역’에 대한 반감과 의구심으로 가득한 김예윤 기자가 최면 받기를 자청했다. 다음은 김 기자와 그가 최면수사를 받는 장면을 지켜본 다른 기자의 시점을 오가는 체험기다.

나(김 기자)는 최면수사 동의서와 면담카드, 응답지 등을 작성한 뒤 의자에 누웠다. 방음 처리된 10m² 남짓한 법최면실은 곧 고요 속으로 빠져들었다. 오 경위는 “머리를 비우고 호흡에 집중하라”고 말했다. 약 5분간 편안하게 호흡했다. ‘절대 최면에 걸리지 않으리라’ 호언장담한 나는 몸에 긴장이 풀리며 나른해졌다. 최면의 늪에 빠져드는 듯했다.

잠시 후 오 경위는 몇 가지 실험을 시작했다. “두 팔을 뻗어보면 풍선이 있으니 바람을 불어넣어 보세요” “두 손에 무거운 책이 들려 있으니 무게를 느껴 보세요” 등 특별한 행동을 번갈아 요구했다.

나는 두 손에 들린 책의 무게감을 느껴보라고 했을 때는 느낌이 와 닿지 않았다. 하지만 손 안에 든 풍선을 부풀려 보라는 얘기에 숨길을 불어넣었다. 두 손이 무언가로 꽉 찬 느낌이 들었다. 이때 김 기자는 허공에서 공기를 모아 부풀리듯 빈손으로 손동작을 했다. 나는 실제 풍선이 부풀어 오르며 내 손바닥에 닿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같이 특정한 행동을 반복하라고 20분 이상 지시한 뒤에야 오 경위는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친구들과 가장 즐거웠던 시간을 떠올려 보세요.”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교실에서 친구들과 과학실험으로 더덕 키우기 내기를 하며 행복해하던 17년 전 내 모습이 너무나 생생하게 떠올랐다. 옆에서 다른 기자가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는 걸 알았지만 나는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초등학교 3학년 그때 기억이 너무 생생해 멈추려고 해도 멈출 수가 없었다.

최면에 걸리지 않겠다고 스스로 굳게 각오했던 터라 오 경위의 주문대로 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지만 허사였다. 1시간에 걸친 최면수사에 나도 모르게 오 경위가 시키는 대로 행동할 수밖에 없던 순간들이 너무나 신기했다. 오 경위는 “최면수사로 희미해진 기억을 극대화하면 잠깐 본 범인이라도 몽타주 그리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 법최면이 잡아낸 15년 전 살인범

김 기자가 체험한 법최면은 수사기법 중 하나로 실전에서 널리 쓰이고 있다. ‘전생을 볼 수 있다’는 식의 허황된 내용이 아니다. 순간 이미지나 과거 기억 극대화에 초점을 둔다. 거짓말탐지기처럼 최면 상태의 진술은 법정에서 증거 능력을 인정받지 못한다. 하지만 범인의 단서를 찾는 데 유용하다.

올해 부산지방경찰청이 15년 만에 해결한 2002년 다방 여종업원 살인사건에서 최면수사는 범인 양모 씨(46)를 특정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유일한 목격자인 이모 씨(41·여)는 8월 부산청 법최면실에서 부산경찰청 과학수사계 전성일 경위(50)를 통해 15년 동안 묵혀둔 기억을 끌어냈다. 이 씨는 범인이 살해한 양모 씨(당시 22세) 계좌에서 현금을 인출할 때 지인 오모 씨를 따라 은행에 함께 갔었다. 15년 전에 딱 한 번 본지라 기억이 희미했다.

“머리는 짧고 검은색 옷을 입고…. 덩치는 보통이었어요.” 전 경위가 “지금 그 남자를 보면 알 것 같나요?”라고 묻자 이 씨는 “일단 보면 알 것 같다”고 답했다. 잠시 후 최면에서 깨어난 이 씨는 한 장의 사진을 골랐다. 범인 양 씨가 2003년 찍은 운전면허증 사진이었다. 1시간 15분간 최면수사를 통해 15년 전 기억이 각성된 것이다. 경찰은 통신수사기록 등을 토대로 양 씨를 특정하고 8월 살인 혐의로 구속했다.

고영재 경찰청 현장지원계장은 “올해 1∼10월 최면수사를 이행한 사건 19건 중 10건이 살인사건이었다”며 “최면은 기억력을 극대화시켜 범인의 몽타주를 그려내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해오고 있다”고 말했다.

의정부=조동주 djc@donga.com·김예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