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의 치안 상황-계엄군 진압 등 당시의 경찰기록-근무자 증언 발표 “시민 총기탈취로 계엄군 집단발포”… 軍기록 상당 부분 왜곡으로 밝혀져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광주 금남로에서 경찰이 시위대와 대치하고 있다. 전남경찰청은 ‘경찰관 증언과 자료를 중심으로 한 5·18민주화운동 과정 속 전남경찰의 역할’이란 보고서를 11일 발간했다. 동아일보DB
전남지방경찰청은 11일 5·18 당시 광주의 치안 상황과 계엄군의 과격 진압, 시위대의 무기 탈취 과정, 북한군 개입설 등에 대한 경찰 기록과 근무자 증언 등에 대한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전남경찰은 경정급 1명, 경감 3명 등 6명으로 ‘5·18민주화운동 관련 경찰 사료 수집 및 활동조사 TF팀’을 꾸리고 4월부터 5개월간 5·18 당시 경찰 활동에 대해 조사했다.
TF팀은 5·18 당시 현장 경찰관과 관련자 137명의 증언을 듣고 국가기록원과 광주5·18민주화운동기록관 등의 협조를 받아 군과 검찰, 광주시, 경찰 내부 기록 등을 조사했다. 당시 치안본부가 5·18 직후 작성한 감찰자료인 ‘전남사태 관계기록’을 이번에 처음으로 확인했다.
당시 치안본부 감찰기록과 경찰관 증언에 따르면 시민들이 최초로 경찰관서의 무기를 탈취한 시점은 5월 21일 오후 1시 계엄군의 도청 앞 집단 발포 이후인 오후 1시 30분 나주 남평지서였다. 신군부는 그동안 시민들이 21일 오전 8시 나주 반남, 오전 9시 나주 남평지서에서 무기를 탈취했기 때문에 군이 자위권 차원에서 발포했다고 주장해왔다.
북한군 수백 명이 광주에 잠입해 시위를 주도하고 사라졌다는 북한군 개입설에 대해서도 반박했다. TF팀은 “당시 광주에 130여 명의 정보·보안 형사들이 활동하고 있었고 시내 주요 지점 23곳에 정보센터가 운영되고 있었다. 이 같은 눈을 피해 광주라는 한정된 지역에서 수백 명의 북한군이 활동했다는 것은 불가능한 상식 밖의 주장”이라고 밝혔다.
TF팀은 조사 보고서에서 “시민 보호의 무한 책임이 있는 경찰이 5·18 당시 군의 과격 진압을 보다 적극적으로 제지하지 못한 점, 포고령 위반자 검거 같은 신군부의 수습 활동 참여 과정에서 과잉 행위 등 경찰의 미흡한 조치에 대해서도 반성과 사과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강성복 전남경찰청장은 “5·18 책임론에 대해 진상조사나 기록이 없었던 탓에 경찰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며 “더 늦기 전에 생존 경찰관의 증언과 자료를 수집해 역사 왜곡을 바로잡고 진실 규명에 도움이 되도록 이번 조사를 시행했다”고 설명했다.
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