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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투 더 동아/10월 11일]1990년 분단 이후 첫 남북통일축구

입력 | 2017-10-10 17:40:00



“(1990년 10월) 11일 오후 3시 5분 평양 능라도 5·1 경기장. 박종환 한국팀 감독(앞줄 왼쪽)과 명동찬 북한 감독을 선두로 남북 선수단이 마주 잡은 손을 높이 치켜들고 입장, 15만 관중의 함성과 어우러져 재회의 기쁨과 통일의 염원이 가득했다. 분단 이후 처음 열린 이날 남북통일축구 1차전은 승자도 패자도 없었다.”

남북통일축구 1차전 소식을 전한 1990년 10월 12일자 동아일보 1면 사진과 사진 설명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일부). 물론 여기서 ‘승자도 패자도 없었다’는 건 비유적 표현일 뿐 사실과는 다르다. 실제로는 북한이 2-1로 이겼다.


문제는 이기는 과정이었다. 양 팀은 1-1로 전·후반 90분 경기를 마쳤다. 그러나 북한 측 주심이 추가 시간에 페널티킥을 선언했다. 당시 동아일보는 “안타깝고 어처구니없는 10초였다”고 소제목을 달고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밝은 낯으로 서로의 등을 토닥거리며 함께 통일의 한 걸음을 내디뎠다고 말하려는 순간 주심의 페널티킥 호각소리가 분위기를 깨고 말았다. 스탠드의 많은 관중과 본부 측의 북측 인사 및 선수, 한국 관계자들까지도 1-1의 무승부를 기꺼워하며 그대로 경기가 끝나기를 바라는 순간이어서 (북한 측) 장석진 주심의 페널티킥 선언은 5·1 경기장의 화해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은 셈이다.”


“1-2로 역전된 순간 본부석의 김유순 북한체육위원회 위원장, 김형진 부위원장의 낯빛도 침통해졌다. 관중들의 호응도 크지 않아 보였다. 김형진 부위원장은 ‘무승부가 훨씬 좋은 것’이라며 아쉬움을 표시했고 경기장을 빠져나가던 한 평양 시민은 볼멘소리로 ‘개운치가 않다’고 했다.”

경기 결과 자체가 중요하지 않았는데 주심이 ‘과잉 충성’ 했다는 얘기였다. 선수들 역시 승부에 집착하지 않았다. 이 경기에서 전반 25분 선제골을 넣은 ‘야생마’ 김주성은 경기 직후 “화해 분위기를 고려해 내가 골을 넣은 후에는 사실상 골문을 열어줬다”고 말했다.


두 팀은 12일 뒤인 그달 23일 서울 잠실 올림픽주경기장에서 다시 맞붙었다. 이번에도 남한 황선홍이 선제골을 넣었다. 그래도 목표는 여전히 ‘무승부’였다. 1990년 10월 24일자 동아일보는 “한국 선수들은 (황선홍의 득점) 이후 더 이상 골을 욕심내지 않는 모습을 보였고 북한은 후반 들어 관중들의 일방적인 성원 속에 윤정수 김광민 김윤철 등이 몇 차례 결정적인 슈팅을 했으니 골로 연결되지는 않았다”고 전하고 있다.

결국 2차전에서 남한이 1-0으로 승리하면서 남·북한은 1승 1패로 남북통일축구 대회를 마쳤다. 당시 남·북한 축구 관계자 사이에서 이 대회를 정례화하자는 이야기가 오갔지만 다시 이 대회가 열린 건 12년이 지난 2002년이었다.

당시 한국미래연합 대표를 맡고 있던 박근혜 전 대통령이 2002년 5월 12일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 북한 축구 대표팀을 초청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김 위원장이 이를 수락하면서 부산 아시아경기 개막을 앞두고 있던 그해 9월 7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남·북 대표팀이 맞대결을 치렀다. 이 경기는 0-0 무승부.

2005년에도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평양에서 김 위원장을 만나 ‘광복 60주년 기념 축구 대표팀 맞대결’을 제안해 광복절 하루 전인 8월 14일 역시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남북통일축구대회가 열렸다. 남한의 3-0 승리.

그 후로 다시 12년이 흘렀지만 네 번째 대회가 열린다는 소식은 어디에서도 들리지 않는다. 아쉽게도 요즘 신문을 보고 있노라면 ‘남·북한 모두가 승자’인 경기를 다시 보려면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할 모양이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