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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광장/이정동]‘기억하지 않는 조직’은 혁신할 수 없다

입력 | 2017-09-15 03:00:00

핵심설계 못 맡는 한국기업… 같은 시행착오 반복하기 때문
글로벌기업은 경험자료 축적… 개인보다 조직역량으로 일한다
설계회사만 기억상실증이랴
경험공유-기억시스템 없이는 피로사회 스트레스만 커질 것




이정동 객원논설위원 서울대 산업공학과 교수

언젠가 엔지니어링 회사의 관계자와 이야기하다가 함께 울컥한 적이 있다. 사연인즉, 본인의 회사가 그 나름대로 복잡한 설계를 전문으로 한다고 자부하는데도 불구하고 설계를 맡기는 한국의 발주기업들이 핵심적인 부분에 대해 자기 회사를 믿지 못하고 자꾸 글로벌 회사의 설계를 라이선스 해오라고 요구한다는 하소연이었다.

처음 듣는 이야기도 아니지만, 척박한 환경에서 부가가치가 낮은 일에 내몰리는 우리 엔지니어들의 처지가 그저 안타까웠다. 현장에서 시행착오를 각오하고 도전해볼 만한 기회 자체를 가질 수 없으니 얼마나 억울할까.

그런데 그 며칠 뒤 우연히 반대쪽 입장에 있는 발주기업의 관계자와 이야기를 나누고서는 생각이 바뀌었다. 오히려 발주기업 측의 항변에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이야기인즉슨, 몇 차례 설계를 맡겼는데 이전 프로젝트에서 범했던 실수가 다음번 유사 프로젝트에서 동일하게 반복되더라는 것이다. 결국 시행착오를 기억하지 않는 조직인데 어떻게 믿고 핵심 설계를 맡기겠느냐는 반론이었다. 그렇다면 그 회사는 왜 같은 실수를 반복한 것일까?

여기 복잡한 기계장치를 정해진 기간 안에 설계해야 하는 프로젝트가 있다. 일반인의 생각과 달리 아무리 새로운 장치라고 하더라도 백지 위에서 설계를 시작하는 일은 없다. 실제로는 이전에 해보았던 유사한 기계장치들의 설계도와 경험자료들을 90%만큼 잔뜩 쌓아두고 충분히 연구하고 검토한 후 새로운 아이디어 10%를 추가해서 마침내 100%짜리 설계를 완성한다. 완성된 새로운 설계도와 작업 중에 생성되었던 각종 경험자료를 정보공유시스템에 다시 올려놓으면 하나의 프로젝트가 종결된다.

글로벌 챔피언 기업과 한국의 기업은 기존의 시행착오 경험을 얼마나 충실히 축적하고 활용하는가에서 결정적으로 차이가 난다. 비유하자면 글로벌 챔피언 기업의 엔지니어는 프로젝트 시작 때 90%의 축적된 경험자료를 가진 상태에서 10%의 차이를 만들어내기 위해 모든 시간을 집중하지만, 한국 기업의 엔지니어는 축적된 경험자료가 10% 정도만 주어진 상태에서 나머지 90%를 개인 역량으로, 혹은 임기응변으로라도 해결해야 한다. 그 결과 이미 상식이 된 ‘바퀴’를 ‘다시 발명’하느라 한국의 엔지니어는 오늘도 야근을 각오한다. 최선을 다한다지만 어쩔 수 없이 이전에 했던 실수가 반복되고, 결과물의 혁신성이 떨어지는 만큼 스트레스는 높아진다.

많은 시간과 자원을 들여 시행착오 경험을 축적하고 잘 활용하는 기업이 진정한 혁신기업이고 결국 글로벌 챔피언 기업이 된다. 처음에는 일의 속도가 느려 굼뜬 듯 보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조직의 기억이 발휘하는 힘은 기하급수적으로 커진다. 뛰어난 개인의 역량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조직 자체가 시행착오 경험을 온몸으로 새기는 고수가 되는 격이다.

글로벌 챔피언 기업에 근무하는 사람이 놀라운 혁신적인 제품을 만들었다고 하면 그건 개인의 역량 덕분이 아니라 기업의 축적된 경험 위에 얹혀 있는 덕분이라고 보면 틀림없다. 그런 챔피언 기업의 구성원들은 창의적 사고에 몰두할 시간이 많아 성취감과 자존감이 높고, 가장 중요하게는 덜 피로하다.

다시 우리의 엔지니어링 회사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야멸차게 들릴 수 있지만, 기억하지 못하는 조직이 시행착오에 나서는 것은 자원의 낭비다. 프로젝트가 성공했다고 해도 재현 가능한 교훈을 얻을 수 없고, 실패한 경우는 말할 것도 없다. 이에 발주기업의 관계자는 우리 엔지니어링 회사가 진정 도전하고 싶다면 먼저 조직의 기억상실증부터 치료해야 한다고 분명하게 지적한 것이다.

설계회사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업종을 불문하고 대기업이든 중소기업이든 공공조직이든 주변의 그 어떤 조직에도 마찬가지로 성립하는 이야기다. 특히 최근 모든 조직마다 혁신의 압력 때문에 새로운 과제를 발굴하는 계획을 세우느라 사무실의 불이 꺼지지 않는다. 그러나 조직에 기억시스템이 없고 경험을 공유하는 문화가 없는 탓에 누구나 열심히 뛰지만 제자리를 맴도는 느낌이고, 피로와 스트레스만 쌓이고 있다. 혁신을 외칠수록 피로사회의 그림자가 짙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국 산업의 혁신적 도전은 기억시스템을 제대로 갖추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정동 객원논설위원 서울대 산업공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