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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관의 오늘과 내일]비서실장은 ‘그림자 비서’가 아니다

입력 | 2017-06-27 03:00:00


정용관 정치부장

“신의 한 수였지.” 임종석 대통령비서실장 임명 직후 여권 신주류의 한 인사가 웃으며 한 말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5월 9일 친문(친문재인) 진영의 핵심인 노영민 전 의원에게 “고생한 것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청와대에 함께 들어가기는 어려울 것 같다”는 취지의 메시지를 전했다. 노 전 의원은 유력한 비서실장 후보였다. 문 대통령이 노 전 의원을 직접 만났다는 얘기도 있고 ‘양비(양정철 전 비서관)’를 통해 자신의 뜻을 전했다는 얘기도 있다. 아무튼 문 대통령의 뜻을 확인한 노 전 의원은 대선 승리에 대한 기쁨과 권력의 중심에서 비켜나는 데 대한 아쉬움이 겹쳐 다른 친문 인사들과 만나 통음을 했다는 후문이다. 문 대통령은 이렇게 대선 기간 자신을 괴롭혔던 ‘친문 패권’ 프레임과 절연하고 임 비서실장을 중심으로 한 젊은 청와대 구상을 실현에 옮기기 시작했다. 첫 열흘은 순항하는 듯했다. 인사 파동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요즘 청와대 시스템에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가 부쩍 커지고 있다. 비서실장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세간의 지적도 들린다. 물론 정권 초창기인 데다 정권 창출에 기여한 여러 그룹이 대통령에게 다양한 루트로 인사 추천을 하는 상황에서 비서실장의 역할에 한계가 있을 수 있다. 정책실장과 국가안보실장까지 3실장 체제하에서 연하의 비서실장 위치가 애매할 수도 있다. 어쩌면 임 비서실장 자체가 여전히 청와대 안팎의 친문 그룹과 ‘묘한’ 긴장 상태에 놓여 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비서실장은 선임 실장으로 청와대의 명실공히 2인자다. 역사상 처음으로 대통령제를 발명한 미국에서도 대통령의 성패가 어떻게 비서실장에 의해 좌우됐는지에 천착한 연구들이 많다. 그중 최근에 나온 책이 ‘더 게이트키퍼(The Gatekeepers)’다. 비서실장의 단순 영어식 표현은 ‘Chief of Staff’, 즉 참모들의 장(長)이지만 ‘대통령의 게이트키퍼’라는 게 더 익숙한 언론 표현이다. 수문장 등으로 번역되는데 그보다는 말 그대로 ‘게이트키핑 역할을 하는 사람’이라는 뜻이 더 들어맞을 것 같다. 진짜 정보와 가짜 정보를 가려내고 정보의 우선순위를 잘 따져 대통령이 옳은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최종적으로 보좌하는 자리라는 것이다.

‘내가 아는 나’와 ‘남이 보는 나’는 다르다.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늘 제3자적 관점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 간극을 메우기는 누구도 쉽지 않다. 대통령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고 대통령의 판단이 틀릴 수도 있음을 깨우칠 조언자가 필요하다.

실제 이 책은 몇 가지 교훈을 담고 있다. 대표적인 성공 케이스로 거론되는 로널드 레이건 1기 정부의 제임스 베이커는 무엇보다 워싱턴 정가를 꿰뚫고 있었던 데다 업무 처리가 완벽했다는 평가다. 특히 ‘입법전략그룹’을 가동해 대규모 감세 등 집권 초 각종 입법을 성공적으로 추진했다. 빌 클린턴 대통령 시절 비서실장을 지낸 리언 패네타는 대통령에게 진실을 말하는 악역을 도맡았다. 요컨대 의회를 전략적으로 다룰 능력, 대통령에게 사실을 가감 없이 보고하고 때론 ‘노(NO)’를 할 수 있는 정직함, 모든 것은 내가 책임진다는 자세 등이 비서실장의 덕목이라는 얘기다.

한 전직 비서실장도 비슷한 얘기를 했다. “비서실장은 사심 없이 누구를 되게 하는 역할이 아니라 안 되게 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대통령을 대신해 무한책임을 져야 한다. 조용히 보이지 않게…. 그래야 각 수석이 존중을 해주고 권위가 생긴다.” 쉽지 않은 일이다. 비서실장은 단순히 ‘그림자 비서’여서는 안 된다. 임 비서실장 인선이 ‘신의 한 수’였음을 입증하는 건 그 자신의 몫이다.

정용관 정치부장 yongar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