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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동빈 기자의 세상만車]벤츠의 역습

입력 | 2017-04-20 03:00:00


메르세데스벤츠에서 최고 성능을 자랑하는 AMG 모델들은 차별성을 원하는 자동차 마니아들에게 큰 인기를 얻고 있다. 메르세데스벤츠코리아 제공

석동빈 기자

국내 자동차시장에서 메르세데스벤츠의 성장세가 심상치 않습니다. 벤츠는 지난해 수입차 브랜드 중 처음으로 연간 5만 대 판매를 돌파했습니다. 정확히는 5만6343대로 10년 전인 2006년 수입차 전체 판매량 4만530대보다도 많습니다. 벤츠의 이 같은 실적은 국내에 생산시설이 있는 쌍용자동차 판매량의 절반에 이르며 매출액은 오히려 더 높습니다.

15년 전만 해도 벤츠가 지금처럼 재도약할 것이라고 예상하는 전문가는 거의 없었습니다. 당시 벤츠의 상품성과 브랜드 평판은 1886년 창사 이래 최악이었습니다. 디자인이 세련되지 못했고, 인테리어와 전자장비는 구닥다리 같아서 권위를 중시하는 장년층에게만 인정받는 재미없는 자동차로 여겨졌습니다. 럭셔리 카 시장에서 오랫동안 차지해왔던 왕좌는 BMW와 아우디, 렉서스의 강력한 도전을 받았고, 일부 시장에서는 3위 이하로 내려앉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하지만 2006년 신형 ‘S클래스’를 내놓으면서 벤츠는 새로운 시대를 예고했습니다. 대대적인 혁신으로 디자인과 성능을 비롯한 종합적인 상품성이 높아졌고, 젊은층을 겨냥해 전에 없던 소형 모델을 대거 투입하면서 짧은 시간에 고루한 이미지를 벗어던지는 데 성공했습니다. 벤츠는 현재 국내에서 18개 차종에 배기량과 스타일별로 모두 70여 개 트림을 판매하고 있습니다. 모든 자동차 브랜드 중 가장 다양합니다. 참고로 현대자동차는 12개 차종에 40여 개 트림이 있습니다.


 
특히 벤츠는 최고 성능 모델만 모아 놓은 ‘AMG’ 부문을 전략적으로 강화했습니다. 다양한 라인업을 갖추고 화려한 디자인을 입히면서 답답해 보이던 벤츠의 이미지를 쇄신하고 큰 수익까지 안겨줬습니다. 이런 벤츠의 노력이 가장 극적으로 표출된 시장이 바로 한국입니다. 지난 10년 사이 판매가 11배로 늘었고, 연간 5만 대, 월간 수입차시장 점유율 40% 최초 돌파 등 신기록 행진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벤츠가 상승세를 보이고 있기는 하지만 한국 시장의 반응은 이례적입니다. 시장 환경이 비슷한 일본과 비교하면 그 차이는 더 두드러지는데요. 2016 회계연도 기준 일본 내 벤츠 판매량은 6만7495대로 한국보다 20% 많은 수준입니다. 반면 일본의 인구는 한국의 2.5배, 자동차시장 규모는 3.5배(경차 포함)에 이릅니다. 수입차의 시장 점유율은 일본이 6%로 한국 15%의 절반 수준도 안 됩니다. 한국은 현재 ‘벤츠 광풍’이라고 불러도 과장이 아닐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런 벤츠의 상승세는 BMW가 만들어줬다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BMW가 2002년 내놓은 4세대 ‘7시리즈’와 2011년 출시한 6세대 ‘5시리즈’는 국내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며 당시 수입차 시장을 평정했습니다. 너무 많이 팔려서 흔해지다보니 럭셔리 수입차의 중요한 가치인 희소성이 훼손됐습니다.

스놉 효과(Snob Effect)가 나타난 것이죠. 특정 고급 상품이 많이 팔려 희소성이 떨어지면 타인과의 차별화를 위해 다른 상품을 구매하는 속물적인 소비자 심리를 뜻합니다. 백로처럼 혼자 고고한 척하는 심리라고 해서 백로 효과로 부르기도 합니다.

2000년대 중반 국내 수입차 1위를 차지했던 렉서스 ‘ES’와 혼다 ‘CR-V’도 너무 흔해지면서 소비자들은 마침 가격이 내려간 독일산 자동차에 눈을 돌렸던 적도 있습니다. 독일 브랜드 내에서도 BMW와 아우디에서 벤츠로 소비자들이 이동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옵니다. 만년 베스트셀러인 현대차 ‘쏘나타’에 식상해진 소비자들이 르노삼성자동차 ‘SM6’와 쉐보레 ‘말리부’로 눈을 돌린 것도 마찬가지 현상입니다. 승자에게 내려지는 저주라고나 할까요.

물론 스놉 효과로 이탈하는 경쟁 브랜드 고객들을 낚아채려면 1등보다 더 나은 제품으로 반격 준비를 완벽하게 해둔 상태여야 합니다. 벤츠도 BMW와 렉서스에 구겨진 자존심 회복을 위해 10년을 치열하게 준비했습니다.

좀 더 크게 보면 수입차로 넘어간 고객들이 다시 국산차로 돌아올 수도 있습니다. 성능 대비 너무 높은 수입차의 가격과 유지비용, 감가상각을 경험하고 나면 ‘허세 탈출’이 유행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경쟁 시장에서 영원한 승자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1등은 방어를 위해 보수적으로 변하기 쉽고 도전자는 창의적인 시도를 하게 마련이니까요.

석동빈 기자 mobidic@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