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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칼럼/이승헌]아메리칸 머슬 폭풍

입력 | 2017-04-10 03:00:00


이승헌 워싱턴 특파원

미국에 살면 백인 남성들의 로망 중 하나가 ‘아메리칸 머슬’로 불리는 미국산 자동차 구입이라는 걸 금방 알게 된다. 연비는 크게 신경 쓰지 않고 고성능 엔진이라는 ‘근육’으로 오로지 질주 본능을 위해 만든 차. 서부를 개척하고 패권국가를 일궈낸 미국인들의 절대 파워, 원초적 힘에 대한 동경심리가 반영돼 있다. 실제로 백인 중산층 집을 보면 독일이나 일본 차 외에 포드 ‘머스탱’이나 GM의 쉐보레 ‘카마로’ 같은 머슬 카를 여분으로 가진 곳이 꽤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도 머슬 카 마니아다. 카마로 오너인 그는 취임 후 미국 대표 오토바이인 할리데이비슨 최고경영자(CEO)를 백악관으로 초청해 오토바이 앞에서 사진을 찍기도 했다. 할리데이비슨은 ‘머슬 바이크’로 불린다.

힘의 상징인 아메리칸 머슬이 떠오른 것은 트럼프 대통령이 6일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과의 정상회담을 앞두고 단행한 시리아 공습을 보고서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그토록 망설였던 시리아 공습을 이틀간의 작전 회의 끝에 결정한 트럼프의 ‘정치적 완력’과 오버랩됐다. 숀 스파이서 백악관 대변인은 7일 회담 후 기자들이 “시리아 공습은 트럼프 국정 기조인 ‘아메리카 퍼스트(미국 우선주의)’의 일환이냐”고 묻자 “당연하다”고 말했다. 미국의 이익에 반하는 세력을 벌하기 위해 힘을 썼다는 것이다.

트럼프 취임 후 많은 것이 바뀌었지만 ‘힘’ ‘승리’와 같은 오바마 정부에선 잘 쓰지 않던 ‘마초적’ 표현이 별 거부감 없이 자주 들리는 게 그중 하나다.

대북정책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워싱턴에서 흔하게 듣는 대북 선제타격은 지난해까지 미군의 비공개 회의에서나 오가던 표현이었다. 마이클 멀린 전 미 합참의장이 지난해 9월 “북한이 미국을 위협한다면 북한을 선제타격할 수 있다”고 공개석상에서 말했을 때만 해도 워싱턴과 서울의 많은 사람이 귀를 의심했다. 일부는 “발언이 잘못 전달됐다”며 현실을 외면했다. 하지만 좋든 싫든 지금은 트럼프 대북정책의 한 옵션이다.

전술핵의 한반도 재배치도 마찬가지다. 기자는 2015년 6월 워싱턴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세미나에서 전술핵 재배치 문제를 들었다. 그 전에는 워싱턴 공개석상에서 거의 거론되지 않았다. CSIS는 미 정부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전술핵의 한반도 배치는 북한에 ‘핵으로 도발하면 즉각 대응한다’는 메시지를 줄 수 있다”고 제안했다. 일부 워싱턴의 진보 매체는 “CSIS가 한반도 비핵화에 역행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기자도 ‘극우 세력이 워싱턴에도 있구나’ 정도로 생각했다.

그런 전술핵은 트럼프 시대 들어 선제타격 못지않게 자주 거론된다. 렉스 틸러슨 미 국무장관은 지난달 한국 방문을 마친 뒤 인터뷰에서 “(전술핵 재배치 등) 한국과 일본의 핵무장 허용을 고려해야 할 수도 있다”고 했다. NBC 방송은 7일 “백악관이 대북정책을 구상하면서 전술핵 재배치 등을 트럼프에게 보고했다”고 전했다.

시리아 공습은 힘을 내세운 트럼프 시대가 이젠 ‘실제 상황’임을 보여준다. 시 주석과의 북핵 담판을 별 성과 없이 끝낸 트럼프가 근육을 또 쓴다면 다음 표적은 북한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비슷한 시간, 한국 뉴스를 보니 정치권은 유력 대선 후보가 ‘3D 프린터’를 왜 ‘스리디’ 대신 ‘삼디’라고 말했는지 논쟁하고 있다. 트럼프를 취재하면서 한국의 현실을 보면 이제 갑갑함을 넘어 무섭다. 북핵 위협만큼이나 트럼프발 ‘아메리칸 머슬 폭풍’이 한반도에 임박하고 있다.
  
이승헌 워싱턴 특파원 dd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