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상에서 ‘성차별’이라며 논란이 된 편의점 도시락. 인터넷 화면 캡처
장선희 문화부 기자
KBS 2TV ‘개그콘서트’의 ‘세.젤.예(세상에서 제일 예민한 사람)’란 코너에는 ‘프로불편러’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상대가 무심코 던진 한마디도 예사로 넘기는 법이 없다. 왜 그런 말을 했는지 꼬치꼬치 따지고, 뼈 있는 대답으로 상대를 기어이 한 방 먹이고서야 직성이 풀린다.
특히 눈길을 끄는 건 개그우먼 이수지가 연기하는 캐릭터다. 세상의 혹독한 외모 평가에 신물이 난 듯, 운동복 차림의 자신에게 무심코 ‘운동선수냐’고 묻는 이에겐 “치어리더다!” 하고 쏘아붙이고, 예쁜 자매들과 함께 있을 때 ‘당신이 첫째냐’고 묻자 “막내다. 그게 그렇게 놀랍냐?”고 싸늘하게 반응한다. 사람들은 그녀의 ‘뜻밖의’ 예민한 반응에 웃음이 터진다.
그간 프로불편러 대열의 선봉에 선 건 주로 여성들이었다. 얼마 전엔 한 편의점이 새롭게 선보인 도시락 이름 때문에 누리꾼들 사이에서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업체가 ‘여친이 싸준 도시락’ ‘엄마가 싸준 도시락’이란 이름을 붙인 게 화근이었다. 프로불편러들은 “왜 남친이 싸준 도시락이나 아빠가 싸준 도시락은 없나” “여자를 밥하는 사람으로 묘사하는 건 불편하다”며 비판했고, 그러자 한쪽에선 “그럼 엄마손 파이도 성차별이냐”며 “지나치게 예민한 반응”이라고 반박했다.
최근엔 프로불편러들의 활동 범위가 점차 넓어지고 있다. 2월 대학로의 한 소극장에선 ‘형, 이거 나만 불편해?’라는 연극이 상영됐다. 연극은 군대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소재로, 병영 문화의 부조리를 다뤘다. 방에 누워 잠든 신병을 보고 화가 난 소대장이 전원 집합을 시키고, 그러면 또 소대장은 병장을, 일등병이 신병을 닦달하는 장면이 나온다. 욕설과 폭력이 더해진 장면을 보고 있노라면 익숙했던 군대 문화가 새삼 불편하게 다가온다. 관객들 역시 ‘군대 문화, 나아가 계급에 대해서 한 번 더 생각해보게 됐다’ 등의 후기를 올리며 호응했다. 익숙했던 것들을 예민한 시선으로 꼼꼼히 들여다볼 때 바로잡아야 할 문제점도 눈에 보이게 마련이다.
한때 ‘둔감력(鈍感力)’이란 키워드가 화제로 떠오른 적이 있다. 소설 ‘실락원’의 저자로 국내에도 잘 알려진 의사 출신 작가 와타나베 준이치가 쓴 책을 통해서다. 작가는 예민한 성격은 수면부터 연애, 결혼생활, 심지어 암 치료에까지 도움이 안 된다며 ‘제발 둔감해지라’고 주문한다. 한마디로 꼬치꼬치 따지려 들지 말고, 또 그 과정에서 나를 괴롭히지 말고 웬만하면 ‘좋은 게 좋은 거다’ 하고 넘어가란 조언이다.
개인을 위해선 그 조언이 어느 정도 맞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꾸는 건 둔감함보단 ‘예민함’이 아닐까 싶다. 영화가 흥행하면 “여배우 무릎의 담요를 내려주겠다”던 한 중견 배우는 “불편했다”는 지적에 “경솔하고 미련했다”며 반성했다. 반대로 장난으로 남자 아이돌 가수의 몸을 만져 성추행 논란에 휩싸인 개그우먼 역시 공개적으로 사과했다. “웃자고 한 건데 뭘 따지냐”며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불편하다’는 지적 덕분에 해당 연예인들도, 이를 지켜보는 일반인들도 내가 무심코 한 행동들을 다시금 돌이켜봤을 것이다. 매사에 편하기만 해선 바뀌는 게 없다. 치열하게 고민하고 문제를 제기하는 프로불편러들의 등장이 반가운 이유다.
장선희 문화부 기자 sun10@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