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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서기 전쟁’ 없앤다며 온라인 추첨 도입했지만… 사립유치원엔 올해도 ‘밤샘 노숙’

입력 | 2016-12-05 03:00:00


11월 선착순 원아모집 접수를 한 서울의 사립유아교육기관에서 학부모들이 밤샘 노숙을 하고 있다. 독자 제공

 #장면1. 서울 영등포구에 사는 주부 김모(35) 씨는 지난달 밤 12시경 잠자리에 누웠다가 급히 오리털 파카를 걸쳤다. 스마트폰으로 지역 인터넷카페를 검색하다가 다음날 오전 9시 접수시작인 한 유치원 앞에 이미 엄마들이 줄을 섰다는 글을 봤기 때문이다. 김 씨는 “원아 선발은 추첨식으로 하지만 당첨된 원아가 등록을 하지 않을 경우 대기자를 접수번호 순으로 채운다는 말이 돌면서 엄마들의 '노숙 소동'이 빚어졌다"며 "집 앞 유치원 하나 보내기가 이렇게 힘들어서야 누가 아이를 낳겠냐"고 반문했다.

#장면2. 서울 마포구의 직장맘 하모 씨(34)는 지난달 퇴근길에 Y센터를 지나다가 깜짝 놀랐다. 이 센터의 유아부 과정 신입 원아 접수는 다음 날 오전 8시부터였지만 벌써부터 10여 명이 줄을 서 있었다. 만 3세인 딸을 이 곳에 보내려 했던 하 씨는 집에도 못 가고 줄을 서 다음 날 오전까지 13시간을 ‘노숙’ 대기한 끝에 등록에 성공했다.

#장면3. 지난달 30일 추첨이 진행된 서울 서초구 S유치원 강당에는 만4세 유아 40명을 뽑는데 총 200여명이 몰렸다.차례로 공을 뽑을 때마다 곳곳에서는 환호와 탄식이 엇갈렸다. 추첨에서 떨어진 학부모 이모(37) 씨는 “작년에도 추첨에 실패해 직장을 그만두고 집에서 애를 봤는데 또 떨어졌다”며 "이 근처에서 유치원에 떨어지고 갈만한 곳은 한달에 200만~300만원을 내야 하는 놀이학교나 영어유치원 뿐인데 감당이 안돼 계속 가정보육을 해야 할 상황”이라고 한숨을 쉬었다.

 정부가 ‘유치원 추첨 대란’을 해결해 보겠다며 올해 처음으로 서울 등에서 온라인 입학관리 시스템 ‘처음학교로’를 시범 운영했다. 그러나 서울지역 전체 유치원(884곳)의 79%(699곳)를 차지하는 사립유치원 대부분이 참가를 거부해 올해도 예년 같은 유치원 추첨 대란이 벌어졌다.



 유치원 원서 접수와 추첨이 진행된 11월 중순 이후 만 3∼5세 아이를 둔 학부모 중 상당수는 가족들과 아르바이트생까지 동원해 보통 5, 6곳에 이르는 유치원을 발로 뛰며 입학설명회와 원서 접수 및 추첨에 참여해야 했다. 인터넷 카페에는 4만 원 상당의 ‘알바비’를 내걸고 대신 추첨을 뛰어줄 사람을 구하는 광고도 등장했다.

 신자에게 혜택을 부여하는 교회나 성당 부설유치원의 경우 유치원 추첨을 앞두고 신자가 급증하는 현상도 나타났다. 학부모 이모 씨는 “일반전형과 신자전형 간 경쟁률 차가 2, 3배 돼 개종도 불사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런 경쟁에 유치원들도 난색을 표하고 있다. 추첨 뒤에도 복수 당첨된 학부모들이 끊임없이 움직이는 데다 빈자리가 났는지 확인하는 대기 학부모들의 민원 제기에 업무 수행이 불가능할 정도라는 것. 서울 강남의 한 유치원 원장은 “다른 유치원을 선택할 학부모님은 제발 빨리 연락을 달라”고 호소했다.

 유치원 대란이 빚어지는 근본적 원인은 유치원에 가려는 아이들보다 유치원 자리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올해 4월 기준 유치원 입원 대상 어린이(만 3∼5세)는 141만 명. 그러나 전국의 유치원이 수용 가능한 인원은 국공립(4696개)이 17만349명, 사립(4291개)이 53만3789명으로 합쳐 70만 명을 간신히 넘는다. 2명 중 한 명은 유치원에 갈 수 없는 것. 나머지는 어린이집이나 놀이학교, 울며 겨자 먹기로 비싼 ‘영어유치원’에 가야 한다.

 특히 인구가 밀집한 수도권은 평균 3명 중 한 명꼴로 유치원에 간다. 서울시교육청에 따르면 올해 서울 공립유치원의 수용률은 6.4%, 사립은 31.4%다. 서울에서 유치원 공급이 가장 부족한 광진구 중곡동은 공·사립유치원 수용률이 13.7%에 불과하다. 강남 지역도 유치원 수용률이 29.9% 수준이다.

 시교육청 관계자는 “서울은 땅값이 비싸 신설이 어렵고, 공립유치원을 확대하는 것도 기존 사립유치원들의 반발이 심해 증설이 쉽지 않다”며 “인구절벽의 여파로 2022년이면 서울지역 유아 수가 급감할 걸로 예상돼 무턱대고 늘리기도 조심스럽다”고 말했다.

 하지만 어린이집 자리를 포함해 계산하더라도 서울 내 대다수 권역의 만 3∼5세 유아 수용률은 100%에 훨씬 못 미치는 60∼70%대다. 이 때문에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에 자리를 못 잡은 부모들은 미술학원이나 월 100만∼200만 원을 호가하는 영어학원 같은 유사 교육 기관에 아이를 맡긴다.

 이순형 서울대 아동가족학과 교수는 “유아기부터 교육 시스템이 무너지고 학부모들이 사교육 부담에 질려버렸다”며 “초등학교 병설유치원 확대 등 현실적인 대안을 강력하게 추진해야 한다”고 말했다

임우선 imsun@donga.com·노지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