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동기 국제부 차장
이후 한일관계는 급진전됐다. 주역은 박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였다. 두 정상은 지난해 말 불가능할 것 같았던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극적으로 합의해 과거사에 발목이 잡혔던 한일관계를 다시 궤도 위에 올려놓았다. 산케이 지국장도 위안부 합의 전에 무죄를 선고받았다. 미국은 한일 양국의 결단에 박수를 보냈다.
역사 갈등만 풀리면 순항할 것 같던 한일관계에 예상치 못했던 핵폭탄급 초대형 악재가 터졌다. 최순실 국정 농단 사건이다. 박 대통령이 사실상 공범으로 지목되면서 완전히 힘을 잃었다. 지지율은 4%. 절뚝거리는 레임덕(임기 말 권력누수 현상)을 넘어 사면초가(四面楚歌) 처지다.
아베 총리에게 박 대통령은 소중한 존재다. 미국의 보이지 않는 압력도 작용했겠지만 국내 반대 여론에도 위안부 문제 합의를 밀어붙여 파탄 직전의 한일관계를 봉합하는 데 일조했기 때문이다. 점증하는 북한의 군사적 위협에 대응해야 한다는 논리로 지난달 한일 군사비밀정보보호협정까지 맺었다. 그것도 최순실 게이트로 시끌시끌한 와중에 난제 중 난제를 속도전으로 처리하는 모습에 일본도 놀랐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박 대통령이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불명예 퇴진할 가능성이 커지면서 일본이 바짝 긴장하고 있다. 특히 한국의 제1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이 위안부 합의를 강하게 비판한 점을 우려한다. 한 야당 의원은 올 10월 주일 한국대사관 국감에서 “정권이 바뀌면 위안부 합의도 새로 해야 한다”고 말해 합의가 뒤집힐 가능성을 시사하기도 했다.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과 뒤이은 한국의 정치 혼란, 그리고 북방 4개 섬 반환에 대해 약속을 뒤집으려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까지. 60% 안팎의 높은 지지율로 질주하던 아베 총리에게 외교 악재가 잇따르고 있다. 아베 총리가 ‘전략적 이익을 공유하는 가장 중요한 이웃나라’라고 표현했던 한국에서 일본과 거리감을 두려는 새 정권이 출범한다면 한일관계의 단추를 다시 끼워 맞춰야 할지도 모른다. 한국을 뒤흔든 최순실 게이트의 불똥은 대한해협을 건너 일본으로 튀고 있다.
성동기 국제부 차장 espri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