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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송진흡]‘靑雲의 꿈’이 ‘곡예사의 기교’로

입력 | 2016-11-25 03:00:00


송진흡 산업부 차장

 “정부 부처 국장만 되더라도 교도소 담장 위를 걸어갈 각오를 해야 합니다.”

 김대중 정부 시절 경제 관련 부처 고위 관료 A 씨가 한 말이다. 당시 A 씨가 근무하던 부처에서 국장급 인사들이 수뢰나 직무유기 혐의 등으로 잇달아 구속돼 뒷얘기를 취재하기 위해 A 씨를 만난 기자는 “무슨 얘기냐”고 되물었다.

 A 씨가 설명했다. “국장 이상 고위 관료가 되면 청와대나 여야 정치권에서 가만두질 않아요. 지속적으로 은밀한 민원이나 지시가 내려옵니다. 그냥 뭉갰다가는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죠. 꺼림칙한 사안이라도 나서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윗선’의 압력으로 어쩔 수 없이 발을 들여놨다가 나중에 ‘탈’이 나는 고위 관료가 적지 않다는 얘기였다.

 A 씨는 그러면서도 관료들이 반성할 부분이 많다는 점도 짚었다. 적당히 청와대나 정치권과 타협하면 ‘출세길’이 보장된다는 점에서 양심에서 벗어난 일을 하는 관료들도 있다는 것이었다. A 씨는 “고시 합격자 대부분은 열심히 일해서 나중에 장관이 되려는 청운(靑雲)의 꿈을 품고 공직에 입문하지만 고위직이 되면 교도소 담장 위에서 곡예를 강요받는 처지”라며 씁쓸해했다. 

 최근 최상목 기획재정부 1차관이 미르재단 설립 작업에 관여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A 씨 생각이 났다. A 씨에게 들은 얘기와 최 차관 사례가 묘하게 오버랩됐기 때문이다. 이번 논란에 대해 최 차관은 “대통령경제금융비서관 시절 직속 상관이던 안종범 당시 경제수석비서관 지시로 네 차례 실무회의를 주재했을 뿐”이라고 해명하고 있다. 모든 것이 다 위에서 정해진 상황이었던 만큼 실무적 지원만 했다는 것이다. 검찰이 법원에 제출한 ‘비선 실세’ 최순실 씨, 안 전 수석, 정호성 전 제1부속비서관에 대한 공소장에도 그렇게 나온다.

 하지만 공소장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최 차관이 단순히 회의만 주재한 것 같지는 않다. 최 차관은 지난해 10월 23일 3차 청와대 회의를 주재하면서 전국경제인연합회 관계자에게 “아직까지도 출연금 약정서를 내지 않은 그룹이 있느냐. 그 명단을 달라”며 모금을 독촉했다고 공소장에 적시돼 있다. 여기에서 주목할 단어는 ‘독촉’이다. 윗선의 지시로 실무적 지원만 했다는 최 차관 해명과 달리 재단 설립에 적극적으로 관여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방증이라는 점에서다.

 최 차관이 미르재단 설립 과정에서 임의로 사용할 수 없는 기본 재산 비율을 낮추는 것을 처음에 반대했다가 나중에 번복했다는 사실이 공소장에 나오는 것을 두고도 말이 많다. 전현직 고위 관료들 사이에서는 “최 차관이 꺼림칙한 일이어서 초기에는 반대를 했지만 나중에 위에서 강한 지시가 내려오자 ‘알아서 긴 것’이 아니냐”는 시각이 적지 않다. 이른바 ‘교도소 담장 위 곡예’가 벌어졌다는 분석이다.

 국가공무원법 68조는 ‘공무원은 형의 선고·징계처분 또는 법이 정하는 사유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그 의사에 반하여 휴직 또는 면직을 당하지 아니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공무원이 공익을 위해 안정적으로 담당 업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신분 보장을 법제화한 것이다. 정권 교체에 관계없이 국민을 바라보고 일하라는 취지다. 하지만 최근 ‘최순실 게이트’와 관련된 기재부나 문화체육관광부 고위 관료들을 보면 국민보다는 청와대만 바라본 것이 아니냐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이런 사람들 월급 주라고 세금 낸 것은 아닌데….
 
송진흡 산업부 차장 jinhup@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