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격랑, 흔들리는 세계질서]美-中, 무역질서 패권 다툼 예고
이로써 오바마 대통령이 중국의 굴기(굴起)를 견제하기 위해 아시아 재균형을 모토로 세계 최대의 단일 무역협정으로 야심 차게 추진했던 TPP는 휴지조각이 돼 버렸다. 오바마 대통령은 “중국이 경제 질서를 쓰게 할 순 없다”며 TPP를 추진해 지난해 관련 국가들과 협상을 타결했다.
민주당 경선 주자였던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도 “미국인들의 건전한 일자리를 빼앗고 있다”며 TPP 반대를 외쳤다.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후보도 표를 얻기 위해 “TPP를 포함해 우리의 일자리를 죽이고 임금을 억제하는 어떤 무역협정도 중단할 것”이라며 “TPP는 대통령으로서도 반대할 것”이라고 입장을 바꿨다. 자신이 국무장관으로 있으면서 추진했던 것을 뒤집어 버린 것이다.
내년 1월 트럼프 행정부가 출범하면 미중은 통상질서 주도권을 놓고 새로운 패권 다툼을 벌일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는 중국과의 무역역조를 해소하기 위해 환율조작국 지정과 중국산 수입품에 관세 45% 부과 등의 카드로 중국을 직접 겨냥할 참이다. 반면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미국의 TPP 폐기를 호기로 보고 대항 카드인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 타결을 밀어붙이기 위해 총력을 다할 방침이다. 중국은 올해 이미 미국 주도의 세계은행과 아시아개발은행(ADB)에 대응하기 위해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을 출범시켰다. 상하이(上海) 국제문제연구원의 장저신(張哲馨) 연구원은 “TPP가 불발되면 미국의 세계 경제에서의 리더십도 의문시되는 반면 중국으로선 아시아태평양 국가들과 경제 관계를 심화하는 큰 기회를 갖게 될 것”으로 내다봤다. RCEP 체결에 탄력을 받을 뿐만 아니라 시진핑 정부의 역점 대외경제 정책인 ‘일대일로(一帶一路·21세기 육상과 해상의 실크로드 프로젝트)’도 날개를 달게 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중국은 19, 20일 페루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서 RCEP의 조속한 타결을 어젠다로 제시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미국의 정권인수 기간을 틈타 중국이 아태 지역 무역질서를 재편할 주도권을 잡았다”고 평가했다.
RCEP는 2012년 11월 캄보디아 프놈펜 동아시아정상회의(EAS) 공동선언을 통해 협상을 시작하기로 한 뒤 지난해 말까지 타결하기로 돼 있었다. 하지만 미국이 TPP 추진에 속도를 내면서 TPP에도 참가하는 베트남과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브루나이 등의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히면서 진행이 지지부진한 상태였다.
워싱턴=이승헌 ddr@donga.com / 베이징=구자룡 특파원 / 이세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