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간으로 밝히는 고대사
경주 안압지에서 출토된 ‘가오리젓 목간’. 젓갈을 담근 날짜 등이 적혀 있어 신라 음식문화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동아일보 DB
최근 경주 월성 내 해자(垓字) 발굴 현장에서 만난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조사원이 기자에게 건넨 얘기다. 해자나 연못, 우물터 같은 저습지 유적은 물에 젖은 진흙이 외부 공기를 차단해 나무 등 유기물이 썩지 않고 보존된다. 따라서 저습지 안에서 나온 목간은 글자를 알아볼 수 있다.
고고학자들뿐만 아니라 고대사를 전공하는 문헌사학자들도 새로 출토되는 목간 자료에 열광한다. 삼국시대 이전의 동시대 사람들이 직접 기록한 사서(史書)가 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삼국시대를 다룬 사서 중 학계가 어느 정도 신뢰하는 것은 고려시대에 찬술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전부다. 역사기록 부족의 갈증을 해소할 수단이 현재로선 비문과 목간 외에는 없는 셈이다. 더구나 목간은 당대 사람들이 남긴 1차 사료여서 후세에 의한 역사 왜곡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이와 관련해 최근 윤선태 동국대 교수가 ‘목간 연구와 신라사 복원’ 논문에서 다룬 신라 목간의 이두(吏讀) 기록이 눈길을 끈다. 이두는 한자의 음과 뜻(훈)을 빌려 우리말을 표기하는 것으로, 우리말과 중국어의 어순이나 문법이 다른 데서 연유한다. 예컨대 고구려는 이미 5세기부터 한문을 우리말 어순으로 재배치하거나, ‘之(지)’자를 문장 종결어미로 사용했다. 그런데 이두가 삼국에서 공히 사용됐음에도 유독 신라에서만 발전한 데 대해 많은 학자들이 의문을 제기해 왔다. 윤 교수는 “고구려와 백제에서 6세기 말 이후 차자표기법(이두)이 정체 또는 퇴조한 것과 달리 신라에서는 6세기 말에서 7세기로 접어들면서 (이두 표기가) 더욱 발전했다”고 썼다.
1975년 출토된 ‘1호 목간’은 경주 안압지(위 사진)에서 나왔다.
그러나 역사학을 전공한 윤 교수는 다른 해석을 제시했다. 오랫동안 구두 전달 위주로 행정명령을 내린 신라의 특수성이 한자 도입 이후 문서에도 반영돼 구어체를 살릴 수 있는 이두 개발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신라 초기에 작성된 각종 목간이 주장의 근거로 제시됐다. 예컨대 월성 해자 2호 목간에서 중국어에 없는 종결어미로 之를 쓰거나, 者(자)를 주격조사 ‘은(는)’으로 사용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그는 “6∼7세기 월성 해자 목간이나 영일냉수리비에 쓰인 어휘와 내용이 일상의 구두 전달 체계를 자세히 표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