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좋은 제품으로 국가에 기여”… 국민 식탁 책임진 ‘맛의 선각자’

입력 | 2016-11-01 03:00:00

[한국 산업계의 파이오니어]대상그룹 故 임대홍 창업주




회장님의 ‘낡은 구두’ 미원 개발자인 고 임대홍 대상그룹 창업주는 평생을 조국을 위한 연구자로 살았다. 미원을 통해 값싼 조미료를 국민들에게 공급했고 이후에도 제품 개발에 한평생을 바쳤다. 항상 그룹의 가장 높은 자리에 있었지만 늘 검소한 생활을 유지했다. 작은 사진 속 해진 구두는 임 창업주의 것. 그는 평생토록 같은 시기에 두 켤레가 넘는 구두를 가져본 적이 없다. 대상그룹 제공

《 대한민국 경제가 위기다. 조선, 해운, 전자산업 등 우리 경제를 지탱해온 기둥 곳곳에 금 가는 소리가 들린다. 새로운 성장동력과 위기를 헤쳐 갈 혜안이 절실한 시점이다. 하지만 한국 경제에는 쌓아 온 자산이 있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의 폐허 속에서 경제 발전의 씨앗을 뿌린 창업 1세대 기업가들의 도전정신과 혁신이 그것이다. 동아일보는 ‘한국 산업계의 파이오니어’ 시리즈를 통해 각 산업 분야의 개척자들을 소개하고 이를 통해 위기 극복의 지혜를 얻고자 한다. 》 

   조미료의 대명사 미원. ‘맛의 원천’이란 뜻처럼 식당의 필수품이다. 하지만 미원은 알아도 임대홍이라는 이름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올해는 미원이 시장에 나온 지 60년이 되는 해이다. 공교롭게 미원을 만든 고(故) 임대홍 대상그룹 창업주가 올해 4월 5일 별세했다. 조미료 국산화를 통해 식탁의 큰 변화를 가져왔던 그는 자신의 이름을 알리려 애쓰기보다 평생 연구자의 길을 걸었다.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던 1세대 창업주의 집념과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겸손함으로 무장한 기업가였다.


○ 그에게 조국이란

 

대상 창립 60주년 기념 나눔행사 31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청정원 나눌수록 맛있는 6000개의 행복’ 행사. 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그는 1920년 전북 정읍시에서 태어났다. 태어나면서부터 청년이 되기까지 일제강점기를 겪은 그는 민족의식이 남달랐다. 전북 이리농림학교를 졸업한 그는 군청 공무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때 한국인을 괴롭히던 직속상관인 일본인 주임을 그의 주도로 동료들과 힘을 합쳐 쫓아낸 일화가 있다.

 일본인 상사보다 그를 분노케 한 것은 바로 일본의 조미료 ‘아지노모토’였다. 일제시대 일본에서 밀수되기 시작한 아지노모토는 빠르게 한국인의 입맛을 길들였다. 광복 후에도 쌀값의 수십 배에 이르는 값에 팔리는 현실에 임 창업주는 안타까움을 느꼈다. 공직생활을 그만두고 무역업에 종사하던 그는 1955년 일본 오사카로 건너가 조미료 제조 공정을 배웠다. 머슴살이와 다를 바 없는 생활을 이어가며 그는 아지노모토의 핵심 성분인 글루탐산 제조 공정을 익혔다. 그는 1956년 1월 부산에 ‘동아화성공업주식회사’라는 조미료 회사를 세웠다. 이 회사가 대상그룹의 전신이다.


○ 평생 연구자의 삶

 맨손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조미료 제조 비법을 익힌 그는 시작이 그러했듯 평생 발로 뛰는 연구자로 살았다. 미원 제조 방법을 익혀 왔지만 만들어낼 설비는 부족했다. 글루탐산 제조를 위해 견고한 농축용기가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된 그는 궁리 끝에 돌솥을 생각해냈다. 경제적이면서도 대량생산이 가능한 돌솥을 개발하기 위해 두 달간 전국 각지를 돌며 꼼꼼히 돌을 골랐다. 이후 그는 4개월 동안 수십 명의 석공과 함께 생산 시설을 완성했다.

 1968년 미원주식회사 회장에 취임하고 1997년 대상주식회사의 창업회장에 취임하는 등 그는 항상 기업의 가장 높은 자리에 있었다. 하지만 다른 기업가들과는 달리 대외 활동보다 혼자 연구하는 걸 즐겼다. 비서실에서 회장실 문을 열어 확인해야만 그의 퇴근 여부를 알았을 정도로 조용히 자신의 공간에서 연구에 몰두했다. 임대홍이란 이름이 많은 사람들에게 낯선 이유이기도 하다. 그의 장남인 임창욱 대상그룹 명예회장은 “아버지는 경영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늘 새로운 제품 개발에 몰두하는 등 연구자로 살았다. 아흔이 넘어서도 관심사는 그룹의 미래를 이끌어가고 국가에 기여할 좋은 제품을 만드는 것뿐이었다”라고 말했다.


○ 몸에 밴 검소함

 조국을 먼저 생각한 연구자의 길을 걸은 그에게 화려한 생활은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평생 승용차보다는 버스와 전철 같은 대중교통을 애용했다. 매일 아침이면 부인 고 박하경 여사가 출퇴근용 토큰 두 개를 챙겨줬다. 평생 동안 한 번에 양복 세 벌과 구두 두 켤레 이상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는 일화는 재계에서 유명하다. 양복은 한 번 사면 해어질 때까지 10년 이상은 입었다. 구두도 더 이상 신지 못할 정도가 돼서야 새것을 샀다. 그룹 총수였지만 골프도 멀리했다. 골프장에 한 번 가본 후 “분수에 맞지 않는다”며 다시는 골프채를 잡지 않았다.

 검소한 삶을 살면서도 사회 공헌 활동에는 열심이었다. 1971년 사재 10억 원을 들여 장학재단을 만드는 등 재산의 사회 환원에 적극적이었다. 1971년 출범한 재단법인 대상문화재단은 현재까지 총 1만5200여 명의 학생에게 약 162억 원의 장학금을 수여했다.

 창업주의 정신을 이어 그룹 핵심 계열사인 대상은 창립 60주년을 기념해 다양한 식재료를 담은 나눔꾸러미 6000개를 소외계층에 전달하는 행사를 31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었다.

한우신 기자 hanwshin@donga.com

故 임대홍 대상그룹 창업주 약력


―1920년 4월 27일 전북 정읍 출생

―1940년 3월 이리 농림고 졸업

―1956년 1월 동아화성공업주식회사

 (대상그룹 전신) 설립

―1963년 1월 미원주식회사 상호 변경

―1968년 7월 미원주식회사 회장 취임

―1987년 9월 미원주식회사 창업회장 취임

―1997년 11월 대상주식회사 창업회장 취임

―2016년 4월 5일 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