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린 지금도 좋은 사람들인가요? 그래, 우린 지금도 좋은 사람들이야. 그리고 앞으로도요. 그래, 앞으로도. 알았어요.―‘로드’(코맥 매카시·문학동네·2010년) 》
우울한 날을 버티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르다. 나는 왕십리의 한 구석진 카페에 숨어 밀크티를 마신다. 거기도 못 갈 상황이면 굉장히 우울한 책을 읽기도 한다. 주로 온통 잿빛의 세기말이나 인류 종말을 가정한 소설들이다. 터널의 끝에 희미한 빛이 보이듯 우울도 아예 밑바닥을 찍고 나면 그 바닥에 주저앉아 비로소 느끼는 게 있다.
내가 가진 코맥 매카시의 ‘로드’는 2010년 판이다. 단단했던 모서리가 조금 해어졌다. 책을 펴고 몸을 이불 밑에 묻었다. 그대로 해가 기울고 저물 때까지 페이지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 와중에도 소년은 끊임없이 “우린 좋은 사람들이죠” “우린 아직 좋은 사람들인 거죠” 하고 남자에게 묻는다. 들짐승처럼 살아가면서도 소년은 버려진 개와 아이를 구하지 못한다는 것을 슬퍼한다. 인간과 비인간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면서도, 남자는 이 같은 소년이 옆에 있기에 살아남고 걸어갈 수 있다.
“그냥 갑자기 거길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책을 덮고 A가 얼마 전 했던 말이 생각났다. 20대 직장인인 A는 구의역 사고 이틀 뒤 저녁에 현장인 9-4번 승강장을 찾았다. 퇴근하고 좁은 자취방에 앉아 있다가 문득 나간 거라고 했다. 많은 이들이 지하철을 타고 그 역에서 문이 열릴 때마다 고개를 들어 밖을 바라본다.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는 세기말이 아니더라도 아슬아슬하다.
곽도영 기자 now@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