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석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어제 “앞으로 친박(친박근혜)-비박(비박근혜)이란 용어를 쓰지 말라”며 필요하다면 주류-비주류라고 표현할 것을 언론에 촉구했다. 비박이라는 말이 대통령을 비토한다는 뜻으로 인식될 수도 있다는 이유다. 4·13총선 참패 이후 당을 수습하고 쇄신할 책임을 맡은 정 원내대표로서는 친박-비박 프레임에 갇혀 한 발짝도 못 나가는 현실이 개탄스럽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친박-비박 용어는 새누리당 문제의 본질이 아니다. 총선 참패 원인도, 패배 이후 집권 여당이 한 달 열흘째 혼돈에 빠진 이유도 친박 패권주의에 있다. 새누리당 전략기획국이 발간한 총선 패인 분석 보고서조차 ‘국민을 무시하고 국민 기대치와 괴리된 공천, 당의 스펙트럼을 좁히는 공천’을 첫째 이유로 꼽았다. 이 공천을 주도한 세력이 친박 핵심이고, 그 결과 친박이 당내 다수를 차지해 당의 스펙트럼은 ‘대통령 중심’으로 좁아졌다.
그런데도 친박은 잘못을 인정하기는커녕 지난주 중진의원 연석회의에서 정 원내대표에게 꼭두각시가 되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겉으로는 ‘혁신 비상대책위원회’ 구성을 맡겼다지만 황우여 강재섭 같은 친박 전 대표를 비대위원장으로 세우자는 얘기는 친박 대표를 옹립할 전당대회까지 어떤 변화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소리다. 2006년 선거에서 참패하고도 친노(친노무현) 세력과 청와대가 현실에 안주하다 대선에서 패배했던 열린우리당을 연상케 한다. 친박 기득권만 유지할 수 있으면 보수정권을 잃어도 상관없다는 웰빙족의 속셈이 역력하다.
정 원내대표에게 빚을 따지면서 친박은 ‘공천 전횡’을 사실상 시인했다. 전횡을 계속하기 위해 원내대표를 밀어붙이는 친박의 오만과 독선에 국민의 인내심은 폭발할 지경이다. ‘결기가 부족하다’는 평을 들어온 정 원내대표는 이제라도 전략적이고 독해질 필요가 있다. 그 자신이 말했듯이 새누리당의 혁신을 어떻게 이뤄내느냐가 과제다. 당을 위해서라면 청와대와 차별화해서라도 혁신을 관철해야 한다. 밀리다 죽으나 맞서다 죽으나 마찬가지다. 정 원내대표가 밀려서 당과 함께 죽을 것인지, 아니면 죽을 각오로 맞서 당을 살려낼 것인지 선택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