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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진단]ICT가 명품의 콧대를 꺾었다

입력 | 2016-02-22 03:00:00


올해 1월 영국 런던에서 열린 버버리 남성 패션쇼. 영국 가수 벤저민 클레먼타인이 무대 한가운데에서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부른 이 쇼는 애플TV의 버버리 앱을 통해 생중계됐다. 버버리 제공

김선미 소비자경제부 차장

세계 4대 패션위크가 있다. 뉴욕, 런던, 밀라노, 파리에서 열리는 세계적 패션쇼다. 이 패션쇼들을 몇 차례 취재한 적이 있다. 패션 바이어, 미디어 관계자, 유명 인사 등 ‘초대받은 자’들이 패션쇼장에 입장하면 통상 30분∼1시간 후에 쇼가 시작됐다. 시간이 금쪽같은 사람들이지만 큰 불평은 나오지 않았다. 10여 년 전에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계적 쇼와 디자이너와 옷들을 ‘직접’ ‘미리’ 보는 것만으로도 패션 선구자라는 인식이 있었다. 그 옷들은 약 6개월이 지나서야 전 세계 매장에 깔렸다.

그런데 이달 5일 영국 명품 ‘버버리’는 글로벌 패션업계에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될 만한 혁명적 선언을 했다. 내용은 이렇다.

‘버버리는 올해 9월부터 향후 패션쇼 일정 및 매장 판매방식을 기존 업계 방식과 다르게 운영할 예정이다. 그동안 매년 네 차례(1, 2, 6, 9월) 선보였던 남성복과 여성복 쇼를 통합해 연 2회(2월과 9월) 열 것이다. 패션쇼 명칭은 기존의 봄·여름 컬렉션과 가을·겨울 컬렉션이 아닌 버버리 컬렉션으로 부르겠다. 쇼에 나온 옷들은 쇼가 끝나자마자 즉시 매장과 온라인을 통해 팔 것이다. 시즌의 경계를 없애고 보다 즉각적이며 개인화된 방식으로 고객을 만날 것이다.’

이것은 버버리가 글로벌 패션업계의 오랜 전통을 무너뜨리고 ‘그들만의 리그’에서 탈퇴하겠다는 것을 뜻한다. 요점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9월에 팔 옷은 9월 패션쇼에서 선보인 뒤 곧바로 팔겠다’는 것이다.

지극히 당연한 얘기 같지만 패션업계는 그동안 이렇게 움직이지 않았다. 글로벌 명품들이 참여하는 세계 4대 패션위크는 매년 2, 3월에는 그해 가을과 겨울의 옷을, 8, 9월에는 이듬해 봄과 여름의 옷을 선보인다. 판매 시점까지 몇 달 동안 바이어는 옷을 구매하고, 언론매체는 관련 기사를 준비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정작 주인공이어야 할 소비자가 소외돼 있다. 봄옷을 장만할 시기에 패션쇼에서는 겨울옷이라니…. 쇼와 현실 사이에는 ‘불편한 계절의 간극’이 있었다. 버버리는 이런 불합리함을 한방에 날려 버렸다.

버버리의 크리에이티브 총괄책임자 겸 최고경영자인 크리스토퍼 베일리는 버버리의 디지털 혁신을 주도하며 버버리를 명품업계 지도 위에 특별하게 포지셔닝해왔다. 2009년 명품 브랜드로는 최초로 온라인에서 패션쇼를 생중계한 이래 페이스북, 카카오톡, 라인, 구글, 애플 등과 다양한 파트너십을 맺고 있다. 패션쇼 음악을 애플 뮤직에서, 패션쇼 메이크업 제품을 카카오톡에서 만나는 고객은 버버리와 공고한 친밀감을 쌓게 된다.

버버리의 혁명적 선언에 즈음해 ‘톰포드’ ‘베트망’ ‘타쿤’ 등 다른 브랜드들도 같은 입장을 표명하고 나섰다. 톰포드는 “모든 것이 즉각적으로 변하는 세상에서 전통적 방식의 패션쇼와 시스템은 예전처럼 통하지 않는다. 고객들이 ‘입고 싶을 때’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 것이 패션업계의 진짜 임무”라고 발표했다.

1943년 시작돼 73년 역사를 지닌 올해 미국 뉴욕패션위크(이달 11∼18일)도 이 같은 변화를 드러냈다. 온라인에서 50∼135달러짜리 입장표를 구입한 1만8000명의 일반 대중에게 패션쇼가 공개된 것이다. 패션쇼 모습은 유튜브와 인스타그램 등을 통해 실시간으로 퍼졌다. 오죽하면 뉴욕패션위크 협회장인 디자이너 다이앤 폰 퍼스텐버그가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11일자 ‘스마트폰은 어떻게 패션쇼를 죽이고 있나’)에서 “지금은 완전한 혼돈의 순간이다. 모두들 새로운 규칙을 배워야 한다”고 했을까.

명품 패션업계는 지금 여러 도전에 직면해 있다. 우선 유럽과 아시아 시장에서 고전하고 있다. 홍콩에서의 반(反)중국 시위, 파리 테러 등으로 소비심리가 크게 악화됐다. 자라, H&M 등 트렌드를 빠르게 반영한 옷들도 넘쳐난다. 게다가 스마트폰은 수십 년간 지속된 패션의 생산, 유통, 소비 방식을 통째로 바꾸고 있다. 과거 명품의 자존심은 희소성 있는 상품에 대한 ‘소비자의 충성스러운 기다림’을 기반으로 했다. 그러나 디지털 환경의 소비자는 ‘원할 때 원하는 것’을 곧바로 얻어야 만족한다. 일부 명품 브랜드들이 현실을 직시하고 오만함을 내려놓은 이유다. 명품은 과거처럼 계속 콧대 높은 태도를 유지할 수 있을지, 소비자가 그 오만함을 예전처럼 받아줄지….

버버리는 명품업계가 처한 혼돈의 시대에 남들이 하던 관행을 깼다. 버버리의 ‘콜럼버스의 달걀’식 시도가 업계에 가져올 변화를 주목한다.

김선미 소비자경제부 차장 kimsunm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