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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문명의 프리킥]북핵 대응, 시간이 없다

입력 | 2016-01-21 03:00:00


허문명 논설위원

“북한 핵실험이 잊혀지는 것 같습니다.”(기자)

“안타깝습니다.”(장인순 박사·76)

칼바람이 매서웠던 그제 저녁 우리는 서울역 근처 중국집에 마주앉았다. 장 박사는 대전에서 KTX로 막 올라왔다. 그는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주도한 재미 과학자 유치 프로젝트에 따라 귀국해 대전 핵연료개발공단에서 일을 시작한 뒤 2005년 원자력연구소장으로 퇴임했다. 핵연료 국산화, 원자로 개발 등을 이끌어 ‘한국 원자력의 아버지’로 불린다. 원조 핵 박사인 그를 만나고 싶었던 것은 북핵과 관련해 ‘구름 잡는 얘기들’이 너무 많아서였다.




핵개발 주역의 한맺힌 증언

―북한 핵 기술 수준이 어느 정도인가.

“수소폭탄 기술은 무려 64년 된 기술이다. 소형화 실전 배치도 마찬가지다. 어렵지 않다는 말이다. 200만 개 부품이 정확하게 돌아가는 원자력발전소 기술이 훨씬 더 어렵다. 지금은 고농축우라늄이나 플루토늄만 있으면 누구나 핵을 만들 수 있다. 국제사회 통제 때문에 만들지 않을 뿐이다. 핵은 인류 에너지원으로만 평화적으로 이용되는 게 맞다.”

그에게 불쑥 물었다. “우리는 얼마나 가능한가?” “이미 세계적 수준에 와 있기 때문에 맘만 먹으면 가능할 것이다.” 이번엔 그가 물었다. “1948년 5월 14일이 무슨 날인지 아는가.” “….” “북한이 남침 준비를 위해 남한에 보내던 전기를 끊은 날이다. 남한은 암흑천지가 됐다. 미국이 발전함 2척을 인천 부산에 보내 배 위에서 발전기를 돌렸다.” 목소리가 약간 떨리고 있었다.

“이승만 박정희 두 분이 아니었다면 에너지를 해결할 수 없었을 것이다. 국민소득 80달러 시절인 1958년에 이 대통령이 미국 대통령 과학고문(워커 시슬러 박사)으로부터 ‘원자력을 하라’는 말을 듣고 이듬해 원자력연구소를 만들었다. 그 가난했던 시절에 200여 명을 국비유학까지 보냈다. 박 대통령은 1970년 1년 예산의 25%를 투입해 미국 WH(웨스팅하우스)사에 고리 1호기 원전을 발주해 마침내 완공(1978년)시킨다. 에너지 자립의 새 역사가 만들어진 거다.”

―1979년도에 95%까지 핵을 완성했다는 증언들이 있다.

“과장됐다. 하지만… 나처럼 평생 핵물질을 만지고 산 사람에게 꿈이 있다면 우리도 평화적 목적을 위한 우라늄 농축 기술을 갖는 것이다. 2004년 연구소에서 레이저 우라늄 농축 시설에 성공한 적이 있다. 그것 때문에 1년 동안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을 받으며 고생 많이 했다.” 그의 학문적 도전정신이 확 느껴지는 말이었다.




北에 언제까지 속아야 하나

“그동안 북한에 너무 오래 속아 왔다. 2006년 1차 핵실험을 한 북한이 2008년 6월 영변 원자로 냉각탑 폭파 모습을 전 세계에 생중계하자 대부분 사람들이 안도했다. 하지만 나는 ‘쇼’라고 말했다. 4차까지 간 이상 더 이상 이대로 넘길 수는 없다.”

식당 밖으로 나오니 북풍이 더 세차게 살갗을 파고들고 있었다. 클라우제비츠는 ‘전쟁론’에서 전쟁을 앞두고 제일 경계해야 할 것이 ‘근거 없는 낙관론’이라 했다. 핵 위기가 터졌는데도 ”김정은이 쓰러졌으면 좋겠다, 북 정권이 망했으면 좋겠다, 중국이 잘해 줬으면 좋겠다” 같은 안이한 주장들이 난무한다.

중국과 국제사회의 실효성 있는 북 제재를 끌어내기 위해서라도 한국 핵무장에 대한 한미 공론화는 더 미룰 일이 아니다. 올해는 총선, 내년엔 대선이 있다. 지금도 북핵 시계는 째깍째깍 가고 있다.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

허문명 논설위원 angelhu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