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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광장/최진석]변화, 그 삶의 본질

입력 | 2016-01-05 03:00:00

삶의 터전 세계가 변하는데 과거 이념-가치관 갇혀있으면
개인도 사회도 국가도 도태
통치 지배력의 주도권을 시민이 갖는 민주의 시대
苟日新, 日日新, 又日新… 새로움에 대한 대학의 경구
모두가 가슴 깊이 새겨야




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교수·건명원 원장

새해가 밝았다. 새로운 해는 동사처럼 꾸며서 ‘새로워진 해’라고 표현해야 더 맞겠다. 세계는 동사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해를 바라보고 감탄하고 다짐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지만, 그보다는 자기 앞에 있는 바로 그해를 새로워지게 하는 것이 더 진실하다.

새로워지는 일에 관해서는 오래된 중국의 고전 ‘대학’에 아주 잘 나와 있다. ‘날로 새로워지고, 날이면 날마다 새로워지며, 또 날로 새로워져야 한다(苟日新, 日日新, 又日新).’ 다산 정약용은 이 책 제목을 ‘대학’이 아니라 ‘태학(太學)’으로 읽어야 한다고 말한다. 일반적인 고급 교육이 아니라 통치자에게 하는 교육 내용이었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내용은 위정자나 지배층에 있는 사람들이 새겨야 할 말들로 채워져 있다. 하지만 이제는 통치 지배력의 주도권을 시민이 가지는 민주의 시대이기 때문에 누구나 새겨야 할 말이다. 사회든 기업이든 리더라면 누구나 이 새로워지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새로워지는 일이 왜 그리 중요한가. 이유는 매우 간단하다. 생존의 터전인 세계가 계속 새로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가 새로운 곳으로 계속 이행하는 운동을 우리는 변화라고 한다. 변화에 적응하면 살아남아 번성하고,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면 사라진다. 인간이나 동물에게 모두 적용된다. 심지어는 역사나 사상 혹은 이념이나 가치관에도 모두 해당되는 원칙이다. 사람이 성장하고 생명을 유지하는 이유는 세포가 계속 교체되기 때문이다. 옛 세포가 새 세포로 바뀌어 새로워지지 않으면 병들거나 죽는다. 뱀도 허물을 벗어야 산다. 허물은 옛 집이다. 어떤 이유로든 옛 집에 남아 안주하고 있으면 죽는다. 뱀만 그러하랴. 세계가 변화하는 것에 따라 이념이나 가치관도 바뀌지 않으면, 그 이념의 주인도 따라서 도태된다.

중국의 춘추전국시대 송나라에 밭을 갈아 먹고사는 농부가 있었다. 하루는 밭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토끼가 뛰어나오더니 밭 가운데 있는 나무 그루터기에 부딪쳐 목이 부러져 죽었다. 토끼를 얻게 된 농부는 그 다음 날부터 농사를 팽개치고 그루터기만 지켜보며 또 그런 토끼가 나오기만 기다렸다. 하지만 한 마리도 얻지 못하고 결국에는 온 나라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수주대토(守株待兎)’라는 꼬리를 달고 돌아다니는 이 이야기가 ‘한비자(韓非子)’의 ‘오두(五蠹)’편에 나온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오두’는 나라를 망가뜨리는 다섯 종류의 부류를 좀벌레에 기대어 한 비유이다. 이 농부처럼 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뜻이다.

송나라는 은나라 유민들이 세운 나라로, 유학의 기풍이 강했다. 고대 유가적 성왕의 말씀을 곧이곧대로 지키는 나라였다. 그래서 시선은 줄곧 과거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초나라와 전쟁을 하면서도 송나라의 양공은 과도한 명분과 고대 성왕들이 제시한 기준만 지키다가 대패하기도 한다. 여기서 한심한 도덕주의자나 명분주의자를 빗대는 ‘송양지인(宋襄之仁)’이라는 말이 나왔다. 나라가 망하려면 논의가 미래적이지 않고 지나치게 과거의 주제들로 채워지는 현상이 지속된다는 것을 한비자는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바보는 과거를 위해서 현재를 희생한다. 세계는 계속 변하고 있는데도, 가만히 멈추어 서서 변해가는 세상만 탓하고 있다면 누가 그 사람에게 창의적 번영을 가져다주겠는가.

이렇게 말하면 옛것을 제대로 익힌 다음 새것을 알아야 한다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을 들이밀지도 모르겠다. 매우 얌전하고 성숙한 말이다. 그러나 실재 세계에서 보통의 사람들은 ‘지신’까지 도달하기가 쉽지 않다. 특히 욕을 먹든 말든 이미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그 기득권을 만들어 준 과거가 더 찬란하기 때문에 더 그렇다. ‘온고’의 중력을 이길 내공을 가진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아서, 대개는 ‘온고’만 하다가 세월 다 보낸다. 그래서 이 말은 차라리 순서를 바꾸어 ‘지신온고’가 되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몸을 새로운 곳을 향해 기울여 놓고 과거를 알려고 해야 한다.

과거는 목적이 아니라 가벼운 수단으로 사용되는 것이 낫겠다. 과거의 논의로 현재를 채우고, 과거의 방법으로 현재의 문제를 풀려고 하면 ‘수주대토’한 농부처럼 웃음거리가 된다. 그런데 바보들은 언제나 다른 결과를 기대하면서도 계속 같은 방법을 사용한다.

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교수·건명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