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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윤신영]여성 과학자, 편견을 이겨라

입력 | 2015-12-25 03:00:00


윤신영 과학동아 편집장

장면 하나. 미국의 대학에 근무하는 한 한국인 교수가 과학책을 냈다. 책은 제법 인기가 있었고, 출판사에서는 다른 저자 몇 명과 함께 강연회를 열기로 했다. 이 일로 미국에서 한국까지 일부러 먼 길을 와야 했던 교수는 틀림없이 고민이 많았을 터였다. 하지만 출판사에서 만든 홍보 포스터를 보고는 ‘참여하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포스터에는 강연자 다섯 명의 사진이 나와 있었는데, 자신이 유일한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교수는 “여자아이들이 와서 보고, 과학은 아저씨뿐만 아니라 아줌마도 한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이유는 간단하다. 여성 과학기술자의 비율 자체가 아주 낮기 때문이다. ‘2013년도 여성 과학기술인력 활용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그해 여성 과학자, 공학자의 비율은 전체의 18.9%였다. 그나마 비정규직을 합친 비율로, 정규직만 따지면 13.7%로 더 낮아졌다. 특히 국공립대 전임교수 비율은 7.3%로 눈에 띄게 낮았다.

한국만의 일은 아니다. 미국의 경우 사회과학 분야 종사자의 58%, 생명, 의학 분야 종사자의 48%가 여성인 데 비해 컴퓨터과학과 수리과학은 25%, 공학은 13%로 낮다(미국 국립과학재단 2014년 자료). 특히 기계(7.2%), 전기 전자공학(8.3%)은 열에 한 명이 채 안 됐다(미국 노동부 2014년 자료).

흥미로운 건, 대학에서 전공으로 이공계를 선택하는 여성의 비율은 종사자 수보다는 많다는 사실이다. 과학학술지 ‘네이처’ 12월 24일자에는 한 천문학자가 쓴 기고문이 실렸다. 2013년 미국 대학 천문학 전공자의 성비를 비교했는데, 대학원생 때 35%에 달했던 여성의 비율은 박사후 연구원(29%) 등 진로를 거칠수록 점점 낮아져서 전임교수 때엔 15%까지 떨어졌다. 똑같이 대학에 입학했어도 박사학위를 받고 전문가가 되기엔 여성이 훨씬 불리한 것이다.

혹시 어려서부터 성별에 따라 능력이나 선호에 차이가 있는 걸까. 미국 국립과학재단의 2012년 자료를 보면 그렇지는 않다. 고등학교까지는 물리학과 공학의 경우 남학생의 수강 비율이 더 높긴 하지만 수학이나 고등 생물 과목을 수강하는 비율은 오히려 여학생이 높았다. 그럼 도대체 무엇이 과학과 공학을 남성만의 영역으로 만들었을까.

지난 주말, 서울에서 ‘걸스로봇’이라는 독특한 모임이 열렸다. 한국과 독일, 미국 등 국내외에서 활약하고 있는 여성 로봇공학자들이 경험을 나누는 자리였다. 여성이 유독 소외된 공학, 그중에서도 가장 소외가 심한 기계와 전자 공학의 결정체 로봇 분야에서 활약하는 여성들의 목소리라 울림이 컸다. 이들은 한결같이 사회적 편견을 소외의 근본 원인으로 꼽으며 “능력에 대한 편견을 버려라”라고 말했다. “여성의 한계에 대해 말하는 ‘잡음’에 저항하라”고도 말했다. 공구를 손에 쥐는 일은 여성에겐 어울리진 않는다는 만류, 여성에겐 특정 직업이 어울린다는 조언이 과학자, 공학자가 되려는 꿈을 어려서부터 스스로 포기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청중은 호의적이었고 분위기도 유쾌했다. 하지만 마냥 웃을 수만은 없었다. 이런 말이 나온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남성 과학자, 공학자는 굳이 저런 말을 후배들에게 들려주지 않아도 된다. 물론 ‘걸스로봇’ 사람들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모임을 만든 것이리라. 서로가 서로의 본보기가 되기 위해. 길고 긴 변화를 함께하기 위해. 그 시도를 응원한다.

윤신영 과학동아 편집장 ashill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