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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세상]겸손은 힘들어

입력 | 2015-12-01 03:00:00


현영석 록셔리 매거진 편집장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말이 있다. 살면서 가장 많이 들어본 속담 베스트 10을 뽑으면 그중에서도 제일 꼭대기에 있을 것 같은 격언이다. 그간 선생님, 친구, 선배, 후배, 책, 텔레비전, 라디오 등 수많은 입을 통해 무수히 들어왔다. 긴 시간 반복 청취를 통해 체화된 것일까. 이제는 조금이라도 자신을 뽐내면 입안에 가시라도 돋을 것처럼 많은 행동이 겸양해지고 말았다. 이게 꼭 나쁜 건 아닐 텐데 내 경우에는 정도가 지나쳐서 문제다. 작은 칭찬에도 손사래를 치며 부정하는 건 기본이고, 어째서인지 기어코 상대보다 내가 더 낮아지려 노력하는 기분이 들 때도 종종 있다.

몇 주 전 한 서점 운영자를 따라 워크숍에 참석한 적이 있다. 서울의 작은 책방 주인들이 모여 공간 운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였다. 본격적인 토론에 앞서 자신을 소개하며 인사하는 시간을 가졌다. 다섯 명의 순서가 지나고 내 차례가 왔다. 여기서 책방 주인이 아닌 사람은 나 하나뿐. “책방을 하지는 않고요. 얇고 가벼운 책을 만들고 있습니다”라고 입을 떼었다. 그 순간 이곳으로 나를 데려온 서점 운영자가 내가 제작한 책을 테이블 위에 펼쳐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시작했다. 어떤 피드백이 나올지 두근거리는 동시에 자세가 주뼛주뼛해졌다. 눈앞에서 누군가가 내 책을 집중해 보는 장면이 아직도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지. 모인 사람들이 미소를 지으며 급기야 칭찬을 한다. ‘하하하, 책방 주인들의 취향이 대단하군. 역시 보는 눈이 있단 말이야’ 하고서 어깨에 힘을 주었다면 폼이라도 났을 거다. 다시 또 몸에 밴 겸양의 자세가 습관처럼 발동하기 시작했다. 듣기 좋은 말들을 탁구공 치듯 튕겨내며 입으로는 “(만듦새가) 엉망진창입니다”를 되풀이하는 것은 물론, 워크숍이 끝날 때까지 과연 ‘인간의 겸허함이란 어디까지 자신을 낮추게 하는가’를 실험하는 사람처럼 반응하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한없이 스스로를 낮추는 모습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 기분이 영 께름칙했다. 발휘해 찜찜한 미덕이 어디 있을까. 겸손이 미덕이라면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보여주는 건 겸손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전적 정의에 의하면 겸손이란 ‘남을 존중하고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태도’를 뜻한다. 워크숍에서 내 행동은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태도를 넘어 왠지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모습에 가까웠다. 그게 오히려 모자란 모습을 내세우는 꼴이 됐을지도 모르겠다.

이유 없이 자신을 깎아내리는 걸 두고 우리는 자기 비하라 부른다. 자기 비하가 쌓여 결국 자기혐오로 악화될 가능성이 있으며 급기야 스스로를 망가뜨리는 원인이 될 공산이 크다. 호의로 보내는 칭찬을 계속해서 부정하는 모습은 또 어땠는지. ‘그래, 누가 이기나 한번 해보자’ 하고 상대의 승부욕을 자극하는 게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바보는 없겠지. ‘이 사람은 욕을 더 좋아하는가 보군’ 하며 상대를 지치게 했을 것이다. 하물며 내가 머리에 바르는 즉시 수만 가닥의 머리카락을 솟아나게 하는 발모제를 개발한 인재도 아니고. ‘자기 자랑 좀 하면 어때. 넌 겸손을 떨 만큼 대단한 존재가 아니’라는 말이 떠올라 과한 겸손은 오만임을 다시 한 번 상기하게 되었다.

어느 심리 전문가는 지나친 겸양은 방어적인 태도에서 비롯된다고 말했다. 자기 입으로 자신의 잘난 부분을 이야기해 자칫 건방지고 경솔한 사람으로 비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과 부족한 자신감을 되레 겸손한 태도로 포장해 스스로를 보호하는 것이라고 했다. 지금의 모습에 자만하지 않고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행하는 게 아니라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 미리 조심하는 일이라면 그건 ‘가짜 겸손’일 것이다. 무의식적으로 반복하는 인정 욕구의 다른 이름이다. 나 역시 그러한 염려에서 자신을 낮췄던 게 아니었을까 생각하니 이것 참 이마 위에 ‘좋아요’를 하나 더 달기 위해 애를 쓴 것 같아 적잖이 민망함을 느낀다. 요즘 서점가에서는 ‘미움받을 용기’라는 책이 39주째 판매 순위 1위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고 한다. 이는 어쩌면 우리 사회의 많은 이들이 마음의 단속으로 곤란을 느끼고 있음을 방증하는 게 아닐는지.

현영석 록셔리 매거진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