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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향기]욕망을 비추는 거울, 유토피아

입력 | 2015-10-10 03:00:00

◇전설의 땅 이야기/움베르토 에코 지음/오숙은 옮김/480쪽·5만5000원·열린책들




거인국을 탈출해 하늘 위를 떠도는 섬 ‘라퓨타’를 발견한 걸리버. 1910년경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출간된 아일랜드 작가 조너선 스위프트의 소설 ‘걸리버 여행기’에 수록된 삽화다. 열린책들 제공

17년 전 군 복무 중 몸을 다쳐 입원했을 때 움베르토 에코가 1980년 발표한 첫 소설 ‘장미의 이름’을 종일 붙들고 읽었다. ‘읽었다’기보다는 ‘시선을 얹어두고 있었다’고 하는 편이 맞을 거다. 이해하기 버거운 문장의 파도 넘기. 멍청해지는 속도를 조금 늦추는 듯한 기만의 욕망을 채우기에는 넉넉했다.

에코의 이 새 책 이탈리아어 원서는 2013년 출간됐다. 80세를 넘겨서도 한결같이 읽는 이의 도전 욕구를 흔들어 깨우는 책을 쓰고 있구나 싶다. 그는 “실제로 어딘가 존재하거나 존재했다고 많은 이들이 생각했고, 그리하여 현재나 과거에 유토피아의 환상을 만들어낸 땅과 장소에 대해 썼다”고 했다.

아틀란티스, 7대 불가사의의 땅, 호메로스가 시로 읊은 공간, 성배(聖杯)의 이동경로…. 영화 속 인디아나 존스 박사가 젊은 시절 열광했을 모험지도가 관련자료 인용을 덧붙여 줄줄이 그려진다. 대중문화 콘텐츠를 틈틈이 언급한 에코는 “피라미드의 석관, 노아의 방주, 성궤의 체적 일치에 주목한 이는 인디아나 존스가 유일하다”고 썼다.

하지만 인디아나 존스는 이제 흘러간 옛 영화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것은 미지의 땅이 존재한다는 믿음 덕이었다”는 서문이 십여 년 전처럼 가슴을 파고들진 않는다. 하늘을 빽빽이 메운 인공위성이 지구 위 미지의 빈틈을 죄다 메워버린 까닭이다.

그럼에도 풍성하되 현학(衒學)하지 않는 에코의 문장은 아서 왕과 원탁의 기사 전설, 네모 선장의 해저 탐험에 흥분했던 기억을 복원해 집요한 추리의 재미를 얹어준다. 칼립소의 품에서 벗어난 오디세우스가 돌아온 고향 이타카 섬은 그리스 관광 가이드가 알려주는 그 섬이 맞을까. 오디세우스의 여정에 관한 이론은 80가지가 넘는다.

발칸 반도와 흑해를 떠돌던 추측이 ‘아프리카를 일주했다’, ‘아메리카를 발견했다’는 이야기로 확대됐다. 오디세우스가 영국 콘월과 스코틀랜드에 머물렀으며 키르케가 준 포도주는 스카치 위스키였으리라는 주장도 나왔다. 심지어 ‘오디세이아’를 중국 민담과 연결해 그가 중국, 일본, 한국에 왔다고 쓴 학자도 있다.

에코는 “제임스 조이스가 소설 ‘율리시스’에서 오디세우스의 여행을 아일랜드 더블린에서의 하루로 재구성한 것은 이런 맥락”이라고 했다. 그가 상상의 땅과 공간을 짚어가며 찾은 것은 결국 인류가 형성한 ‘믿음의 흐름’이 어떻게 변해왔는가에 대한 이야기다. 멍청해지는 속도를 늦춰주는 듯한 에코 문장의 효력. 여전하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