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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리한 과세에 적극 대응”… 기업들 방어에서 공격으로

입력 | 2015-09-23 03:00:00

[5대그룹 소송폭발 시대]<中>정부-지자체 상대 소송 급증




LG전자는 올해 3월 과세 당국이 377억여 원의 법인세를 부과하자 이에 불복해 소송을 냈다. LG전자는 2005년 캐나다 통신업체인 노텔네트웍스와 통신장비 등 분야에서 공동 사업을 하기 위해 합작 회사인 LG노텔을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발생한 법인세와 LG전자의 미국, 중국 등 해외 자회사의 지급 보증 수수료를 둘러싼 세금 등에 관해 과세 당국과 벌이는 다툼이다.

○ 5대 그룹 “정부·지자체도 더이상 예외 없어”

과거에는 대기업들이 주저했던 소송이 최근엔 부쩍 늘고 있다. LG전자나 SK텔레콤 등과 같이 과세 당국을 상대로 한 행정소송은 최근 눈에 띄게 늘어난 현상이다. 강석훈 율촌 조세그룹 대표변호사는 “1990년대 후반까지는 기업이 정부 상대로 소송을 하지 못했다”며 “3, 4년 전부터 과세 당국이 대기업을 압박하면서 무리한 과세 등이 발생해 소송이 늘어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2011년 1월부터 올해 상반기까지 5대 그룹 주요 계열사에서 행정법원에 제기된 소송은 총 125건(825억 원)이다. 이 중 조세 관련 소송이 21건(16.8%)으로 561억 원(68.0%)에 이른다. SK텔레콤도 2008년 하반기부터 2010년 하반기까지의 휴대전화 단말기 구입 보조금에 대한 과세 당국의 세금 부과를 둘러싸고 2974억여 원 규모의 소송전을 벌이고 있다. SK텔레콤의 휴대전화 단말기 구입 보조금 등이 세법상 부가가치세 과세표준에서 제외되는지에 관한 내용이다. 또 다른 이동통신회사인 KT도 휴대전화 단말기 보조금을 둘러싸고 법원에서 재판을 진행하고 있다.

롯데 등 유통업체가 정부 등을 상대로 제기한 소송도 있다.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의 영업제한 관련 소송이 롯데쇼핑의 소송 161건(1660억 원) 중 22건(46억 원)에 이른다. 대형마트가 있는 지역의 지자체는 조례에 따라 대형마트의 영업 제한시간을 0시부터 오전 8시까지로 하고 매월 둘째·넷째 주 일요일을 의무휴업일로 지정한다는 내용의 처분을 내렸다. 이에 롯데쇼핑 등은 “지자체의 영업시간 제한은 부당하다”며 소송을 냈다. 2012년부터 유통산업발전법 시행령이 개정되면서 지자체들이 대형마트의 영업시간을 제한할 수 있게 됐고 이에 따라 대형마트들이 관련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 담합으로 인한 손해… 기업, 배상해라

5대 그룹은 ‘법률 리스크’를 오히려 기업 성장의 기회로 삼아 수익을 창출하는 전략을 구사하기도 한다. 특히 담합으로 인한 피해는 공정거래위원회에 의해 이미 위법성이 인정된 것으로 소송을 통해 확실히 배상을 받게 된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미국 기업은 법무팀이 독자적으로 수익을 창출하고 특히 담합으로 인한 피해일 경우에는 무조건 손해배상을 받을 수 있어 적극적으로 나선다”며 “한국도 이런 경향이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LG전자 등 LG그룹 4개 계열사가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 등 국내외 12개 항공사를 상대로 낸 유류할증료 담합으로 인한 4억여 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 LG전자가 대만의 액정표시장치(LCD) 패널 및 브라운관 제조사 5곳을 상대로 제기한 100억 원대 규모의 가격 담합 손해배상 소송 등이 대표적이다. 또 대림비앤코 등 12곳의 도자기 업체들이 액화석유가스(LPG) 수입사인 E1을 상대로 LPG 공급 가격 담합에 따른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하는 등 관련 소송이 중견·중소기업으로까지 확산되고 있다.

공정거래위는 2000년 SK에너지 GS칼텍스 에쓰오일 현대오일뱅크 인천정유(SK인천석유화학) 등 5개사가 1998년부터 3년간 군납 유류 입찰 과정에서 담합을 통해 부당 이익을 취했다는 이유로 1901억 원의 과징금을 부과했다. 이를 근거로 방위사업청은 2013년 8월 군납 유류 입찰 과정에서 사전에 모의한 5개 정유사로부터 1355억 원의 손해배상금을 받아 국고로 환수했다. 박해식 율촌 공정거래팀 변호사는 “첫 담합 손해배상 사건인 군납유류 소송에서 방사청이 손해배상을 받으면서 기업들 사이에 담합 피해에 대한 소송이 확산되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 기업 소송의 진화… 방패에서 창으로

국내 대기업 간 소송도 늘고 있다. ‘오너’ 간 친분과 소송을 꺼리는 한국 기업 문화 때문에 대기업 간 소송은 과거에는 거의 찾기 힘들었다. 문병순 LG경제연구원 책임연구원은 “기업 간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예전과 달리 국내 기업끼리 넘어갔던 사안에 대해서도 소송으로 해결하는 경향이 나타났다”고 말했다.

이동통신회사인 KT는 올해 1월 SK텔레콤을 상대로 10억 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2012년에는 삼성전자가 ‘LG전자 냉장고 용량이 작다’며 조롱하는 광고를 내자 LG전자가 100억 원대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내기도 했다. 지난해 2월에는 삼성전자가 영국 다이슨을 상대로 “근거 없는 청소기 특허소송으로 명예 등을 손상했다”며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다.

지식재산권 분야에서도 수세에 몰렸던 국내 기업이 선제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했다. 삼성전자는 최근 프린터 토너 카트리지 모조품을 판매한 삼일오테크 등 기업에 대해 특허권 침해로 침해금지, 폐기 및 6억5000만 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다.


▼ 기업들, 사내 법무인력 확충 ▼

“법률 리스크 철저 관리” 삼성 변호사만 335명… 로펌 2위 태평양 수준


“변호사가 기업의 이사일 경우 회사의 가치는 9.5% 올라가며, 경영진이 되면 회사 가치는 10.2%까지 상승한다.”

미국 애리조나대 루보미르 리토브 교수가 2013년 발표한 ‘상장회사에서 변호사인 이사의 역할’에 관한 논문 내용이다. 소송 사례와 규제, 사내 준법 감시의 필요성이 함께 커지면서 각 기업이 법률 전문가 인력을 확충하는 명분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실제 미국 상장회사 중 변호사를 이사로 선임하는 상장회사의 비율이 2000년 24.5%에서 2009년 47.5%로 9년 새 2배 정도로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국내 기업들도 법률 전문가 수요가 늘면서 사내 변호사를 대폭 고용하는 분위기다. 특히 5대 그룹의 경우 규모 면에서는 이미 주요 대형 로펌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수준이다. 8월 말 현재 서울지방변호사회에 등록된 서울시내 소재 기업 사내 변호사는 1000여 명에 이른다. 5대 그룹 변호사 회원 수를 살펴보면 △삼성 335명 △현대자동차 96명 △SK 93명 △LG 105명 △롯데 35명이다. 변호사로 등록하지 않고 회사의 법률 업무를 검토하는 법무 인력은 이보다 훨씬 많다.

삼성의 사내 변호사는 변호사 수 기준 로펌 순위에서 2위인 태평양(342명), 3위인 광장(340명)과 대등한 규모다. ‘2005년 100명 정도에 불과하던 변호사가 10년 사이 국내 변호사 250명, 외국 변호사 250명으로 늘었다’는 삼성 관계자의 말을 염두에 둔다면 “사실상 국내 최대 로펌”이라는 세간의 이야기도 설득력이 있다. 삼성은 10년 전 1000여 명의 사내 변호사를 두고 있던 제너럴일렉트릭(GE)을 벤치마킹해 법무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법무팀을 법무실로 확대해 주목받았다. 현대차와 SK, LG의 등록 사내 변호사 수는 국내 10위권 로펌과 맞먹는 규모다.

전문가들은 “사내 변호사들에게는 이미 발생한 법률 분쟁 대처는 물론이고 분쟁이 생길 기미가 보일 때 좀 더 섬세한 전략 구상이 요구된다”고 입을 모은다.

법무법인 광장의 임성우 변호사는 “미국은 기업에서 초기 분쟁 대응 매뉴얼 등을 구축해 뒀다가 리스크가 발생하지 않도록 위험 관리를 위해 최대한 노력하지만 우리나라 기업들은 주요 대기업을 제외하고 이런 시스템을 갖추고 있는 곳이 거의 없다”고 지적했다.

배석준 기자 eulius@donga.com
신나리 기자 journa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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