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시-행시생이 찾던 산속 고시촌… 요즘은 9급-경찰 준비생이 주류 부모 눈칫밥-친구들의 유혹 피해… 세상과 담 쌓은채 채용시험 공부 “이 시대 청춘들은 취업 난민”
점점 더 부모 얼굴 보기가 미안했다. 밤이면 친구들 연락에 술자리로 불려가는 일도 많았다. 편의점이나 식당에서 혼자 식사하는 것도 지겨웠다. 익숙한 공부 환경에 정신 상태도 나태해져만 갔다. 변화가 필요했다. 세상과 담 쌓고 채용시험을 준비하고 싶었다.
취업을 준비하며 시내 독서실을 전전하던 홍정선 씨(27·충북 청주)는 고민 끝에 재작년 3월 집을 나와 충북 보은군의 한 산속 고시촌에 들어갔다. 인근 마을에서 걸어서 20분 거리. 도로 위에 새 떼가 온종일 앉아 있어도 될 만큼 외진 시골 마을이다. ‘취업 난민’이라 자조하는 청춘들이 모인 곳이기도 하다.
○ 취직하러 산으로 간 청년들
신입 순경 공채시험을 보름 정도 앞둔 홍 씨는 요즘 오전 6시 반에 일어나 밤 12시가 훌쩍 넘어 잠든다. 오전 7시 졸음을 쫓아가며 책을 읽다 보면 어느새 아침 식사 시간. 잠깐의 ‘커피 타임’이 끝나면 그때부터 잠들기 전까지 ‘공부-식사’라는 단순한 강행군이 이어진다. 체력 단련을 위해 저녁 식사 전 헬스장 이용 30분, 그리고 산책 15분이 자신에게 배정한 자유시간이다.
그는 “공부에 방해될까 봐 휴대전화는 아예 숙소에 두고 독서실에 간다”며 “빨래는 사흘에 한 번, 같은 시험을 준비하는 이곳 동료와 ‘스터디’ 하는 시간 외엔 똑같은 하루의 반복이다”라고 말했다. 숙식비를 포함해 고시촌 한 달 평균 생활비 40만 원 안팎. 가끔 부족한 생활비를 아껴 읍내에서 치킨과 맥주를 사오는 날이면 이 고시촌의 잔칫날이 된다.
각오가 흐트러졌던 때도 있었다. 혈기왕성한 20, 30대 남녀가 경치 좋은 곳에서 서로의 처지를 위로하다 보니 종종 사랑의 감정이 싹트기도 한다는 것. 홍 씨는 “속세의 유혹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곳을 찾았는데, 처음 1년 동안은 야유회 온 기분이 들어 동료와 어울려 한참을 놀았다”며 “합격한 동료들이 떠나고 나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며 자책했다.
○ 이 시대 청춘은 모두 ‘취업 난민’
채용 시험에 여러 번 낙방한 뒤 현재 9급 공무원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김모 씨(32·서울)는 “2개월 전부터 이곳에 들어와 공무원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이틀에 한 번꼴로 어머니로부터 격려 문자가 온다”며 “못난 아들 걱정에 속앓이하고 있을 부모님을 생각하면 하루빨리 이곳을 벗어나야겠다고 다짐한다”고 말했다.
김 씨는 취업난에 산까지 찾아온 자신의 처지를 ‘취업 난민’이라고 표현했다. 취업에 도움 되는 환경을 찾아 유랑하는 모습이 꼭 정착할 곳을 찾아 떠도는 난민의 모습과 닮았다는 뜻이다. 그는 “산과 절로 찾아드는 고시생뿐만 아니라, 취업 명당을 찾아 도심 고시촌, 대학가 쪽방촌 등 장소를 가리지 않고 떠도는 이 시대 청춘들은 모두 같은 마음일 것”이라며 “더 이상 취업을 꿈만 같은 일로 생각하지 않는 그런 시대가 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보은=김재형 기자 monam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