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사상 최강의 악역 리스트에 합류할 만한 또 하나의 괴물이 탄생했다. 천만 관객 돌파를 향해 순항 중인 ‘베테랑’의 조태오는 한국 재벌의 비리와 횡포를 여과 없이 보여주는 ‘실존적 악당’이다.
그동안 영화나 드라마 속의 재벌 악역은 계속해서 진화해왔다. 가장 최근의 대표 사례로는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의 소름 돋는 연쇄살인마이자 소시오패스 재벌 2세 이재경(신성록), 드라마 ‘쓰리 데이즈’에서 한반도에 전쟁까지 일으키려 했던 사이코패스 재벌 회장 김도진(최원영) 등이 있다. 소시오패스, 사이코패스 등의 설명에서도 보이듯 요즘의 재벌 악역 캐릭터들은 점점 더 절대악의 화신처럼 그려지는 추세다.
영화 ‘베테랑’의 조태오(유아인)는 어쩌면 저들에 비하면 철없는 어린애 수준으로 비춰질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역대급 악역으로 평가받는 이유는 악마처럼 과장된 캐릭터가 아니라 지극히 현실적인 악당이라서다. 그가 저지르는 모든 악행에서는 지독한 기시감이 느껴진다. 신문 사회면이나 방송 뉴스, 시사 프로그램을 통해 익히 봐왔던 재벌들의 악행과 ‘갑질’을 그대로 닮았기 때문이다. 실제 류승완 감독도 조태오를 재벌 만행의 총집합적인 인물로 빚어냈다고 인정한 바 있다. 포털 사이트에서 ‘조태오’를 검색하면 관련 키워드로 ‘실존 인물’ ‘모델’ 등의 단어가 자동적으로 뜨는 것도 그런 이유다.
또 다른 유명 실존 모델로는 롯데가의 고 신동학이 있다. 신준호 푸르밀 대표이사의 장남인 그는 거침없는 악행들로 인해 아직까지도 갑질 재벌 2세의 전설로 회자된다. 1994년 자신의 그랜저 앞을 “버릇없이” 가로막았다는 이유로 프라이드 운전자를 벽돌로 내리친 사건, 1997년 같은 상류층 자제들과 마약 파티를 벌인 사건, 2000년 음주 단속 경찰관을 차에 매단 채 광란의 질주를 벌인 사건 등이 대표적이다. 영화 속 마약 파티 신과 클라이맥스 자동차 추격 신의 모티프가 된 동시에 조태오의 ‘막 나가는’ 캐릭터에 많은 영향을 준 인물로 보인다. 그는 2005년 태국 여행 중 실족사 했다.
영화 밖에서도 쉬지 않고 이어지는 횡포
연예인 스폰서 이야기도 빠지지 않는다. 조태오는 마음에 드는 여성 연예인들을 자신이 투자하는 영화의 주연으로 내세우거나 자사 광고 모델로 기용하는 등 권력을 행사하며 그 대가로 성접대를 받는다. 현실에서도 연예인 접대나 스폰서 문제는 ‘고 장자연 리스트’처럼 소위 ‘지라시’ 루머를 넘어 수면 위로 부상하는 사례가 종종있다. 다만 그 접대를 받는 스폰서나 ‘갑’의 존재는 은폐되는 경우가 훨씬 많다는 것이 영화와의 차이점이다.
‘베테랑’의 재벌 만행 재현에는 조태오 부친 조 회장(송영창)도 동참하고 있다. 검찰에 소환될 때 많은 재벌 총수들이 애용하는 아이템 휠체어를 타고 출두하는 장면은 씁쓸한 웃음을 자아냈다.
요컨대 ‘베테랑’은 한국 재벌들의 갑질에 대한 생생한 보고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창업자에서부터 3~4세대로까지 이어져오는 동안 사회의 로열 패밀리로 자리 잡은 그들은 과거보다 더 강해진 특권 의식을 바탕으로 갑의 횡포를 일삼는 사례가 늘고있다. 지난해 조현아 대한항공 전 부사장의 ‘땅콩 회항’ 사태, 그리고 최근 강신호 동아쏘시오그룹 회장의 막내아들 강정석 사장이 주차 위반 경고장을 부착한 관리 요원의 노트북을 던져버린 사건까지, 영화 밖 재벌들의 갑질은 쉬지 않고 이어진다.
글 · 김선영 대중문화 평론가 | 사진 · 동아일보 사진DB파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