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준 소설가
내가 처음 내 글이라는 것을 세상에 내놓을 당시만 하더라도 실력과 재기가 번득임에도 불구하고 등단을 하지 못하고 있는 선배들이 종종 있었는데, 이는 신춘문예 결심에 올라온 수제자의 작품을 발견하고는 일부러 탈락시키곤 하는 선생님들이 계신 까닭이었다. 재주만 승해 데뷔를 하면 오래 못 가 제풀에 좌초될 것을 우려하는, 글을 쓴다는 것에는 비단 기술적이 측면만이 아니라 노동자와 예술가로서의 자세가 무르익어야 한다는 스승의 준엄한 경계(警戒)였다. 돌이켜 보건대 그런 강직한 훈도가 안 좋은 결과를 낳은 경우는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오래 혹독하게 수행한 글쟁이가 오래 훌륭하게 남았다. 비인부전(非人不傳), 즉 인간 됨됨이가 갖춰져 있지 않은 자에게는 가르침을 줄 수 없다는 깐깐함이 요즘 세태에는 고리타분한 헛소리로 받아들여질 게 빤하지만, 어쨌든 그것이 불과 이십여 년 전 한국 문인들의 품격이었던 것은 분명하고 문학의 시대에 그러한 문인들을 대중은 기꺼이 존경했다.
젊은 나이에 다른 꿈을 좇아 문학 전임교수를 때려치운 지도 어느덧 딱 십 년째다. 그 사이 정신없이 요동치는 세상을 따라 나 역시 많이 휘둘리고 깎여 나갔지만 이런 시대에도 소설과 시 쓰기에 대해 고민을 상담해 오는 문학청년들을 가끔 사석에서 만나게 된다. 대개는 쓴웃음으로 그 자리를 피하곤 하지만, 실은 내가 해주고픈 충고란 요컨대 고작 이런 것이다.
대한민국의 근대가 여태 미완성인 만큼 대한민국의 언어는 아직 한참 미완성이고, 이것은 곧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국가의 수준이 된다. 글이 그 내용과 형태의 가치를 담보할 때까지 스스로 감추고 기다리는 태도야말로 글쓰기의 가장 중요한 기법일진대 이 당연한 사실을 작가와 대중이 모를 때 그 사회는 언어의 무간지옥 속에 갇힌다. 나는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이 꼴인 것도 바로 그 때문이라고 본다. 국회의원들의 수준을 알고 싶은가? 국회의원들이 작문을 해보면 알게 될 것이다. 물론 보좌관들이 대신 써주지 않을 때 말이다. 국민들의 수준을 알고 싶은가? 그 국민들이 평소 어떤 글을 서로 나누고 있는지 보면 안다. 물론 그 국민들이 타인에게 상처를 주려는 목적으로 태어난 괴물들이 아니라면 말이다.
모더니스트임을 자부하며 양주를 마시고 바를 나서다 서울의 비포장 진창길에 절망하던 시인 김수영을 그 진창보다 더 괴롭힌 것은 시구가 한국어가 아니라 일본어로 떠오르는 바로 그 자신이었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모국어의 행복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 대한민국은 신문맹인(新文盲人)들이라는 새로운 야만인들의 국가다. 과연 우리 중 누가 저 1960년대의 고독한 시인 김수영의 고통 앞에서 당당할 수 있을 것인가?
이응준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