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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이진]기억의 승자

입력 | 2015-04-03 03:00:00


이진 오피니언팀장

얼마 전 e메일 한 건을 전달받았다. 발신자는 온라인 게시물 관리대행업체라는 S사였다. 지난해 동아일보에 실렸던 한 외부기고를 인터넷에서 내려달라고 요구했다. 이 글에는 이름만 대면 다 알 만한 출판사가 등장한다. 한 임원이 여직원을 성추행했다는 얘기를 ‘○○○ 출판사 사건’으로 표현했다. 이 임원이 불기소 처분을 받았으니 글도 더이상 게시하지 말아야 한다고 S사는 주장했다. 글 때문에 임원은 계속 가해자로 남고 출판사는 이미지가 완전히 추락했다는 것이다. 글은 인터넷에서 쉽게 찾을 수 있지만 무혐의 결론은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란다.

이 사례는 우리가 ‘검색이 곧 기억인 시대’를 살고 있다는 점을 실감하게 해준다. 모바일이 대세가 되면서 기억의 저장소는 어느덧 스마트 기기로 넘어갔다. 머리가 기억의 공간으로 쓰이는 일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이제 사람들의 기억을 지배하려면 인터넷을 장악하면 된다. 실제로 연예인의 스캔들이 터질 때면 인터넷 선점 작전이 벌어지곤 한다. 문제가 된 연예인과 관련된 다른 글을 무더기로 올려 스캔들이 검색되지 않도록 기획하는 것이다. 작전이 성공하면 스캔들은 기억의 밑바닥으로 가라앉게 된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최근 미국 워싱턴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일본군 위안부를 ‘인신매매에 희생당한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헤아릴 수 없는 아픔과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을 겪어 마음이 아프다고 덧붙였다. 아베 내각은 과거 내각의 역사 인식을 지지한다는 점을 아주 분명하게 밝힌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전체적으로 절제된 표현을 사용해 공감이나 배려의 분위기를 만들려고 했다는 생각이 든다. 일본 총리로는 처음으로 4월 말 미국 상·하원 합동연설을 하는 점을 의식했을 법하다.

하지만 아베 총리가 위안부는 인신매매의 희생자라고 언급한 대목이 고약하다. 사람을 사고파는 일은 먼저 파는 사람이 있어야 가능하다. 누가 딸을 팔아버릴까? 시모무라 하쿠분 전 일본 관방장관(지금은 문부과학상이다)은 2007년 “위안부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며 나는 일부 부모가 딸을 팔았던 것으로 안다”라고 말했다. 많은 일본인이 위안부를 이렇게 기억할 것이다. 위안부와 인신매매를 연결하면 ‘팔려간 여자들’의 이미지가 떠오를지도 모른다. ‘위안부=인신매매’ 등식은 일본 총리의 발언으로 다수의 기억으로 자리 잡을 수 있다. ‘강제 연행’이나 ‘본인의 의사에 반해’ 같은 기억을 밀어내는 것이다.

정지영 이화여대 부교수는 ‘효녀 심청’이라는 글에서 인신매매 프레임을 배제하지 말자는 주장을 펼친다. 그는 ‘딸을 판 부모가 있었다고 해도 일본 군부와 국가에 면죄부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라고 강조한다. 일제의 식민지배가 얼마나 가혹했으면 부모가 딸까지 팔았겠느냐고 따질 수 있다는 얘기다. 기억 속에 가려진 다양한 위안부를 불러내 제국주의와 천황제, 전쟁 등의 문제점을 바로 보도록 정면 대응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됐다.

동아일보 창간 95주년을 맞아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10명 중 7명꼴로 한일관계를 개선하고 아베 총리와 정상회담을 해야 한다고 응답했다. 대통령이 취임한 지 2년이 넘도록 일본과 정상회담을 하지 못한 것은 아무래도 비정상이다. 그렇다고 기억까지 내줘서는 안 될 일이다. 광복 70주년이 4개월여 앞으로 다가왔지만 기억의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참, 앞머리의 S사에 글을 통째로 내리는 것은 지나치니 접점을 찾아보자고 전했다. 하지만 S사로부터는 아무런 연락이 오지 않았다. 지금 이대로의 기억이 옳다고 생각할 수밖에….

이진 오피니언팀장 lee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