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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년전 쿠데타 주역, 민주 지도자로 부활

입력 | 2015-04-02 03:00:00

나이지리아 독립후 첫 민주적 정권교체 이룬 부하리
쿠데타 집권 2년만에 쿠데타로 축출… 4번째 대선 도전 끝에 재집권 성공
現정권 부정부패로 민심 등돌려… 보코하람 테러도 승부에 큰 영향




아프리카 대국 나이지리아에서 지난달 31일 역사적인 정권 교체가 이뤄졌다. 3월 28, 29일 치러진 대선에서 무함마두 부하리 후보(73·사진)가 이끄는 제1야당 범진보의회당(APC)이 52.4%를 득표해, 43.7%의 굿럭 조너선 현 대통령을 누르고 정권을 잡았다.

나이지리아의 민주적 정권 교체는 1960년 영국에서 독립한 이래 55년 만에 처음이다. 인구 1억7800만 명으로 아프리카 최대 인구 대국이자 1위 경제 대국인 나이지리아가 이룬 첫 평화적 정권 교체는 장기 독재가 일상화된 아프리카 대륙에 적잖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이번 선거는 1994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넬슨 만델라가 첫 흑인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래 가장 정치적으로 중요한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부하리 대통령 당선인은 32년 전 쿠데타로 집권했다가 2년 뒤 다시 쿠데타로 축출됐던 인물이다. 이후 그는 30년간 세 번의 대선 도전과 실패를 거쳐 이번 4번째 선거에서 민주주의적인 방식으로 정권을 탈환했다.

이번 대선 결과는 이변으로 여겨지고 있다. 부하리는 지금까지 ‘한물간’ 늙은 정치인이라는 말을 들어왔다. 2007년 대선에서 상대가 70%의 표를 얻을 동안 부하리 후보는 18%를 득표했고 2011년 대선에서도 상대 후보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득표율이 나왔다. 그의 이미지는 ‘만년 2등 정치인’이었다.

이번 선거에선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단체 보코하람의 득세와 굿럭 조너선 정부의 부패가 겹치면서 부하리 후보가 반사이익을 얻었다. 북부에서 보코하람에 희생당한 사람은 2만 명이 넘는다. 보코하람의 주요 근거지인 보르노 주에선 유권자의 94%가 부하리 후보에게 표를 던졌다. 과거 군 장성이었던 그가 집권하면 보코하람을 쓸어낼 것이란 기대감 때문이었다.

조너선 정부 각료들의 부패 스캔들이 터지면서 1980년대 부하리가 심어놓은 청렴한 이미지도 그의 집권을 도왔다. 1983년 12월 육군소장이던 부하리 후보는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뒤 ‘부패 청산’을 핵심 과제로 삼고 군사 재판을 시작해 고위 인물 수백 명을 투옥시켰다. 독재자란 비난에 시달리다 1985년 8월 부하의 쿠데타로 실각해 3년 동안 감금생활을 했지만 당시 보여준 부패 청산 의지를 국민들은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또 그가 과거 3번의 대선에서 깨끗하게 패배를 승복했던 것도 독재자라는 이미지를 희석시키고 민주주의를 중시하는 정치인으로 거듭났음을 보여줬다.

부하리는 1942년 나이지리아 북부 이슬람 가정에서 23번째 자식으로 태어났다. 영국에서 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1961년부터 군에 투신했고 1979년부터 1980년 사이 미국 펜실베이니아 칼라일에 있는 미군 육군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기도 했다. 1976년 이후 오바산조 군사정권하에서 보르노 주지사, 석유장관, 국영 석유공사 사장을 지내며 정치를 배웠다.

부하리는 두 번 결혼을 했는데 공교롭게도 첫 부인이 딸 4명과 아들 1명을 낳은 데 이어 재혼한 둘째 부인 역시 딸 4명과 아들 1명을 낳았다. 1980년대 중반 대통령 부인을 지낸 아내와는 1988년 이혼했고 현재 아내와는 1989년 재혼했다.

한편 이번 대선에서 투표에 참여한 유권자는 인구의 15%에 불과한 2800만 명에 그쳤다. 당초 6880만 명이 유권자로 등록했지만 보코하람의 선거 방해와 유혈사태 등으로 투표율이 크게 떨어졌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