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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김성한]역사 직시해야 한미관계 발전한다

입력 | 2015-03-09 03:00:00


김성한 고려대 국제대학원 교수 전 외교통상부 제2차관

눈부신 아침 햇살을 무색하게 만든 광기(狂氣)의 테러에도 불구하고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의 의연한 모습과 우리 국민의 성숙한 대처 덕분에 위기에 처할 뻔했던 한미관계는 견고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이렇듯 한미관계는 환갑을 넘긴 동맹관계임에도 불구하고 끊임없는 관심과 노력을 필요로 한다. 기실 양국관계는 리퍼트 대사 피습 사건 전에 미묘한 도전을 맞이했었다. 2월 27일 웬디 셔먼 미 국무부 차관은 워싱턴의 동북아 관련 세미나에서 과거사 문제가 동북아의 갈등을 유발하고 있다고 강조하면서 “민족감정이 악용될 수 있으며, 정치지도자가 ‘과거의 적’을 비난함으로써 값싼 박수를 받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이 같은 도발은 진전(progress)이 아니라 마비(paralysis)를 초래한다”고 비판했다.

셔먼 차관의 발언은 과거사 문제로 발목이 잡혀 미래로 나아가지 못하는 동북아의 현실을 부각하고자 다소 강한 표현으로 당사자들의 각성(覺醒)을 촉구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역사 갈등 속에서 ‘과거의 적’은 일본을 지칭한 것이고, 이를 비난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주체가 한국 중국 북한 대만 등일진대, 셔먼 차관의 언급은 한국을 겨냥한 것이 아니냐는 ‘오해’를 살 만했다. 일본의 ‘역사 수정주의’를 준엄하게 꾸짖기보다 일본의 역사인식 수정을 촉구하는 이웃 국가들의 행위를 도발(provocation)로 규정한 것은 매우 부적절했다.

미국은 태평양전쟁의 승리자로서 전후 질서를 구축한 장본인이었으므로 과거사에 대해 초연할 수 있다. 당시의 적이었던 일본을 굴복시키고 동맹국으로까지 받아들였으니 미국은 ‘관대한’ 전승국이었다. 그러나 바로 이 관대함의 배경은 공산주의 세력의 등장이었다. 소련에 이어 중국이 공산정권을 수립하면서 미국은 이들에게 대항할 전초기지로서 일본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일본에 대한 ‘패전 처리’를 제대로 하지 않았고, 그 결과 제국주의 역사가 말끔히 청산되지 못했다.

현재의 동북아는 당시 상황을 연상시킨다. 중동 문제 등으로 바쁜 미국으로선 중국의 부상(浮上)이 위험한 방향으로 전개되지 않도록 일본의 도움이 필요한 처지다. 아베 신조 내각의 역사관에 문제가 있다고 보면서도, 중국 때문에 일본의 기여와 한미일 안보협력의 강화를 기대한다. 따라서 미국은 한미동맹을 양자관계로 생각하지 않고 한미일 ‘삼각동맹’의 관점에서 평가한다. 미국은 한미관계에 문제가 없더라도 한일관계가 안 좋으면 한미일 삼각체제가 삐걱거려 한미동맹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느끼게 되는 것이다.

상황이 이럴진대 우리는 견고한 한미동맹의 지속을 위해 냉철한 외교를 전개해야 한다. 우선 역사문제에 관해 미국이 피해자인 한국과 가해자인 일본을 양비(兩非)론의 관점에서 평가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올바른 역사인식 위에서 한미일 공조체제가 견고하게 작동할 수 있다. 한미일 안보협력의 대상은 북한이라는 점을 명확히 하면서도 중국의 부상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끄는 데 거시적 관점에서 한국이 협조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워싱턴에 싹트고 있는 한국과 중국이 ‘밀착’하고 있다는 인식을 바꾸는 일이다. 외교부는 인적, 물적 자산을 동원해 대미 공공외교(public diplomacy)를 강화해야 한다. 워싱턴의 이러한 인식이 일본의 로비 때문이라는 얘기가 있지만, 사실 여부를 떠나 누군가 한국을 중국 쪽으로 몰아붙여 동북아 전략구도가 한중 대 미일 구도로 재편된다면 미국의 국익과 정면으로 배치된다는 점을 역설해야 한다. 한국은 중국과의 관계를 존중하지만 외교의 중심축은 어디까지나 한미동맹이고 안보외교의 핵심은 한미일 공조라는 점을 지속적으로 강조해 나가야 할 것이다.

김성한 고려대 국제대학원 교수 전 외교통상부 제2차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