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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칼럼/전승훈]프랑스의 세속주의와 톨레랑스

입력 | 2015-02-16 03:00:00

전승훈 파리 특파원


“종교는 집이나 사원에서만 믿어라. 자신의 신앙을 왜 공공장소에서 표현하느냐.”

“그럼 기독교 신자들도 로마시대처럼 카타콤베(지하묘지)에서 숨어서 예배를 봐야 하는가. 모든 종교 행위가 은밀하게 치러지는 비밀의식이어야 하는가.”

풍자 주간지 ‘샤를리 에브도’ 테러 사건 이후 프랑스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논쟁이다. 프랑스 정부는 공공장소에서 자신의 종교를 드러내는 행위에 대해 ‘프랑스 공화국’의 정체성을 깨뜨리는 행위라고 비판한다. 반면 이슬람 신자들은 ‘신성모독의 권리’까지 표현의 자유라고 주장하는 프랑스인들을 문화적 식민주의라고 공격한다.

한국에서는 지하철에서 “예수 믿으세요!”를 외치는 개신교 전도사, 길거리에서 목탁을 두드리며 절을 하는 불교 승려를 쉽게 볼 수 있다. 종교적 심성이 열정적이면서 타 종교에 대한 포용력도 큰 한국인의 눈으로 볼 때 프랑스의 이러한 논쟁은 다소 낯설다.

테러 사건 직후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의 종을 울렸을 때 샤를리 에브도 직원들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고 한다. 이 잡지는 이슬람은 물론이고 가톨릭까지 모든 종교권력을 비판하고 조롱해 왔기 때문이다. 숨진 스테판 샤르보니에 전 편집장은 “나는 이슬람 혐오주의자가 아니라 무신론자”라고 밝힌 바 있다.

프랑스의 ‘종교적 세속주의(La¨icit´e)’의 원칙은 1789년 프랑스 대혁명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혁명의 주역인 시민 부르주아지 세력은 왕과 귀족뿐 아니라 종교권력과의 치열한 싸움 끝에 공화국을 세웠다. 또한 종교개혁 당시 신구교 간 유혈충돌, 제2차 세계대전 때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에 대한 기억은 정치와 종교를 철저히 분리하는 계기가 됐다. 이 때문에 가톨릭의 나라로 알려진 프랑스는 “어떤 신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비율이 40%로 유럽 제일의 ‘반(反)종교’의 나라가 됐다. 프랑스에서 ‘선(禪) 불교’가 인기인 이유가 불교가 신을 믿는 종교가 아니라 ‘철학’이나 ‘명상법’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그런데 2000년대 들어 이슬람 이민자들이 급증하자 프랑스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이슬람은 종교와 생활을 분리할 수 없어 곳곳에서 마찰을 빚고 있기 때문이다. 급기야 니콜라 사르코지 전 대통령은 2011년 공공장소에서 모든 종교적 상징물을 추방하는 법률을 통과시켰다. 공립학교에서는 무슬림 소녀의 스카프, 유대인 소년들이 머리에 쓰는 키파(모자)도 금지됐다. 최근에는 관청에 설치된 크리스마스 구유 장식도 불법이라는 판결이 나왔다.

세속주의란 다른 문화와 종교를 인정해온 ‘톨레랑스(관용)’의 전통에 기초한 공화국의 원칙인데, 모든 종교의 존재를 부정하는 ‘무신론’과 혼동되면서 이슬람과의 갈등을 불러왔다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미국식 소수 공동체 활성화보다는 공화국의 전체적 가치를 내세우는 프랑스에 대해 “계몽(啓蒙) 근본주의” “종교의 자유가 아니라 ‘종교로부터의 자유’를 외치는 나라”(뉴욕타임스)라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어쨌든 파리 연쇄 테러 사건 이후 프랑스는 공화국의 새로운 ‘정체성과 가치’에 대한 토론이 한창이다. 대한민국도 세계화 시대를 맞아 동남아 이주 노동자와 국제결혼 커플이 크게 늘어나고, 탈북 난민들의 규모도 커지고 있다. 이제 우리도 이념과 종교, 인종을 넘어 대한민국을 통합할 수 있는 정체성과 가치가 무엇일까 하는 논쟁을 시작해야 할 때다.

전승훈 파리 특파원 rap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