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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rrative Report]짓밟힌 조선의 꽃들… 내가 역사이고 증인이다

입력 | 2014-10-30 03:00:00


《 노인이 말문을 연다. 올해 92세의 ‘극노인’이다. 그는 일본군 위생병 출신이다. 자신이 참전했던 제2차 세계대전 때 일이다. 그는 8년 전까지 한 번도 전쟁 경험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자신의 과거와 마주할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랬던 그가 이제 참회의 대열에 뛰어들었다. 》

마쓰모토 마사요시 씨가 23일 가나가와 현 사가미하라 시의 한 찻집에서 자신의 증언집 ‘내가 중국에서 싸운 성전의 실태에 대하여’를 가리키며 일본군의 전쟁범죄와 관련된 기억을 떠올리고 있다. 증언집의 부제는 ‘위안부 문제의 뿌리에 있는 것, 아울러 오늘날 일본은 어떻게 가고 있는가’이다. 사가미하라=배극인 특파원 bae2150@donga.com

가나가와(神奈川) 현 사가미하라(相模原) 시에 사는 마쓰모토 마사요시(松本榮好) 씨. 1943년 현역으로 입대한 뒤 1944년 2월 부산과 베이징(北京)을 거쳐 중국 산시(山西) 성 위(盂) 현에 파견됐다. 그는 입대하기 1년 전인 1942년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기독교 신자로 참전한 것이다.

“전쟁터에서 본 것을 모두 감추고 무덤에 가는 사람이 많다. 입을 열면 자신의 죄와 마주해야 하는 데다 세상 사람들의 비판과 조소를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증언을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내 마음을 후세들이 이해해 주기 바란다.”

뒤늦은 증언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23일 사가미하라 역 앞 찻집에서 만났을 때 그는 꼿꼿한 자세로 기자를 맞았다. 고령의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는 “8년 전 목사직에서 은퇴하고 친척이 사는 가나가와로 이사한 뒤 나의 과거를 아는 교회 관계자의 증언 요청을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그의 대답은 ‘직언직설’이었다. “후세들이 과거를 알지 못하면 같은 잘못을 되풀이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내가 겪은 과거를 계속 증언하겠다.” 그의 말에는 기력이 넘쳤다. 그의 증언이 종교적 동기 이상인 것이 분명했다.

○ 위생병이 기억하는 ‘조센 삐’

그는 1944년 당시 산시 성의 일본군 가타메(固)여단 7대대에 배치됐다. 이 부대에서 그는 본부 위생병으로 근무했다. 대대 본부에는 위안소가 있었다. 이 대목에서 그는 “요즘 군 위안부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내가 바로 증인”이라며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병사들은 그녀들을 ‘조센 삐(창녀)’라고 불렀다. 하지만 여자들의 표정은 도무지 기억이 안 난다. (나 자신이) 잊고 싶었나 보다.”

22세 당시 전쟁터에서 각인된 기억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6명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기모노 차림이 아니었다. 모두 조선인 위안부였다. 이들이 어떤 연유로 어디서 왔는지는 병사인 나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부대가 어디선가 연행해 왔을 것으로 짐작하고 있었다.”

곧이어 위생병 시절의 증언이 이어졌다. 그는 당시 일본 군의관이 하는 일을 도왔다.

“군의관들은 매달 이들의 성기에 원통형 기구를 꽂고 성병 검사를 했다. 검사라고 대단한 게 아니라 내부에 염증은 없는지, 뾰루지는 없는지 육안으로 살피는 수준이었다. 만주사변(1931년 일제의 중국 침략전쟁) 이후 1937년 중일전쟁의 기폭제가 된 상하이(上海)사변에 이르기까지 중국에 파견된 일본군 상당수가 성병에 걸렸다. 아프면 쓸모가 없게 된다. 병력 유지가 안 될 정도였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군부가 부대 안에 위안소를 만들고 관리했던 것이다.”

당시 가타메 여단은 7개 대대로 구성돼 있었다. 대대 본부에 6명의 위안부가 배치됐으니 여단 전체에는 어림잡아 약 42명의 위안부가 동원됐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대대 병력은 약 1000명이었다.

“이들이 모두 위안소를 이용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위안소는 주로 장교와 하사관 전용이었다. 대대 본부의 병사들도 가끔 이용했다.”

○ 강간하려는 병사에 콘돔 나눠줘

그는 상서(上社) 전의 분견대로 파견됐던 시절 일본군의 야만행위를 떠올렸다. 중대 본부 병력이 남방전선으로 대거 옮겨가면서 북쪽에는 30명 규모의 분견대가 남아 있었다. 하지만 전투다운 전투가 벌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분견대가 하는 일이라곤 ‘토벌’이라는 이름으로 중국인 마을을 습격하는 일이었다. 식량을 빼앗고 여성을 강간하는 일이 흔하게 벌어졌다.

“전선에 배치된 일선 중대와 분견대에는 위안소가 없었다. 이들은 유하오구냥(有好姑娘·괜찮은 아가씨 있나)이라고 외치며 중국인 마을을 습격했다.”

토벌이 되풀이되던 어느 날 분견대는 도망칠 기회를 놓친 20, 30대 여성 7, 8명을 납치해 왔다. 병사들이 이들을 주둔지 막사 구석에 감금하고 번갈아 강간하기 전 마쓰모토 씨는 콘돔을 나눠줬다. “성병에 걸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고 당부하는 게 위생병이 하던 일이었다. 당시를 떠올리며 마쓰모토 씨는 눈을 감았다.

“거부했어야 했는데 거부할 수 없었다. 아니, 거부하지 않았다. 위생병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죄의식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변명도 안 된다. 결국 나는 전쟁범죄인이다.”

이야기를 돌려 “위안부 강제연행은 없었다”는 일본 우파의 주장에 대한 질문을 던지자 그는 다시 눈을 떴다.

“물론 여성들은 자기 발로 걸었다. 비명을 지르지도 않았다. 그 상황에서 저항한들 무슨 의미가 있었겠나. 절망 속에 모든 것을 체념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강제연행이 없었다고 우길 수 있나.”

중국 여성들이 끌려온 지 일주일 정도 지나 체력이 바닥나자 일본 병사들은 이들을 마을로 돌려보내기로 했다. 그 대신 촌장에게 2명의 여성을 보내라고 요구했다.

“결국 촌장이 교환 조건으로 2명의 여성을 보내왔다. 아마 매춘부였을 걸로 짐작하지만 정확히 모르겠다.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가운데 패전을 맞았다.”

○ 야스쿠니신사법안에 반대한 이유


일본 자민당은 1969년 야스쿠니(靖國)신사에 국비를 지출해 정부가 관리·보호한다는 내용의 ‘야스쿠니신사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 법안은 당시 기독교를 비롯한 일본 종교계의 거센 반발에 부닥쳐 참의원 통과를 앞두고 흐지부지됐다. 마쓰모토 씨는 당시 반대 운동에 앞장섰던 종교인 중의 한 명이다.

“중국 산시 성의 한 마을을 덮쳤을 때 일이다. 어느 민가의 문이 조금 열려 있자 동료 한 명이 뛰어들었다. 강도짓이나 강간을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문 위에 설치된 폭약이 터지면서 즉사했다. 내 눈 앞에서 벌어진 일이다. 당시 나도 모르게 ‘이런 녀석도 명예롭게 전사했다고 야스쿠니신사에 모셔지겠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민당의 야스쿠니신사법안에는 ‘전사자의 위업을 영원히 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돼 있다. 마쓰모토 씨의 말이 이어졌다. “그런 바보 같은 짓이 영원히 전할 위업인가. 전사자가 전쟁터에서 도대체 무슨 짓을 했는지 알기나 하는가.”

그는 “모든 잘못의 배경에는 천황제가 있다”고 풀이했다.

“과거 일본은 전시 동원을 위해 천황을 현인신(現人神·인간의 모습을 하고 태어난 신)으로 떠받들며 그를 정점으로 하는 국가 체제를 만들었다. 동시에 교육 현장에서는 ‘일본은 좋은 나라, 깨끗한 나라, 세계에서 유일한 신의 나라’라고 주입했다. 이 과정에서 중국 사람이나 조선 사람을 멸시하는 마음이 우리 안에 만들어져갔다. 조선 사람과 중국 사람들에게는 무슨 짓을 해도 괜찮다는 분위기가 만연했다.”

긴 한숨이 이어졌다.

“요즘 분위기가 전쟁 전과 다르지 않다. 자민당이 고치려는 헌법 초안 등을 보면 천황제가 부활하고 있다. 교육 현장도 이상해지고 있다.”

지금 일본 누리꾼들은 마쓰모토 씨가 ‘제2의 요시다 세이지(吉田淸治·사망)’라며 맹공을 퍼붓고 있다. 요시다 씨는 제주에서 위안부를 강제 연행했다고 증언했으나 나중에 허위로 드러나 논란이 된 인물이다. ‘마쓰모토 씨가 사실은 조선인’이라는 억지 주장까지 나온다.

그는 누리꾼의 반응에는 덤덤했다. 하지만 일본 정부가 일본군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인정하고 사죄한 1993년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관방장관 담화를 흔들고 있는 것과 관련해서는 절망감을 나타냈다.

“과거에도 그렇고 지금도 마찬가지로 일본 정부는 나쁜 짓은 숨기고 모두 없었다고 주장한다. 어째서 일본은 나쁜 짓을 하지 않았다고 하는가.”

마쓰모토 씨는 지금도 각종 교회 모임에서 증언을 계속하고 있다. 증언을 듣는 일본인들의 반응이 궁금했다.

“아무런 반응이 없다. 마음속에서는 여러 생각을 하겠지만 내색을 않는다. 일본인에 대한 험담을 더는 듣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 걱정이다.”

인터뷰가 끝나고 발길을 돌리는 마쓰모토 씨의 그림자를 봤다. 그와 같은 사람이 일본을 지탱하는 한 축이라고 생각하니 그림자가 그리 어두워 보이지는 않았다.

사가미하라=배극인 특파원 bae215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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